깊은 숲과 구불구불한 강물이 엮어 낸 외딴 구릉 위, 그곳에 잠자는 언어 보존소가 있었다. 이 낯설고 신비로운 곳은 세상을 떠난 수천 개의 언어들과 그 단어들, 주문처럼 살아 움직이는 글자들이 쉼을 취하는 안식처였다. 여기서는 언어가 단순한 기호나 음성이 아닌 고유한 ‘정령’처럼 존재했다. 그들은 각 글자마다 감정과 기억, 뿌리를 갖고 있었으며 세상의 말들이 사라지는 위험 속에서도 저마다의 빛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오늘은 잠자는 언어 보존소의 특별 수업 날이었다. 어둠에 잠들었던 언어의 정령들이 모여들고, 담당 개성 넘치는 직원들은 단 한 글자의 소중함에 대해 아이들과 깊은 교감을 나누려 했다. 직원들은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언어와 친해지고, 사라져가는 말들을 구해내며 마침내 세상에 부활시키는 사명을 품고 있었다. 유일무이한 ‘언어 구조 해설사’인 시온은 이 수업의 주인공이자 안내자였다.
“한 글자의 힘은 결코 가볍지 않아요.” 시온은 오래된 나무 책상 위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그의 옅은 갈색 눈동자는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저 ‘ㄱ’, ‘ㅏ’, ‘ㄴ’, ‘ㄷ’처럼 보이는 글자들이 모여서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고, 언어가 됩니다. 하지만 그들이 없으면 어떤 단어도, 어떤 이야기도 살아날 수 없어요. 오늘은 그 ‘한 글자’들의 진짜 삶을 함께 느껴볼 거예요.”
언어 정령들이 조용히 움직였다. ‘한글’의 첫 자음 ‘ㄱ’부터 ‘ㅎ’까지, 각각의 글자는 꿈처럼 흐릿한 빛을 내며 자신만의 성격을 드러냈다. ‘ㄱ’은 강직하고 듬직한 성격으로, 갈림길마다 방향을 제시하는 존재였다. ‘ㅏ’는 맑고 투명한 소리로 생명력을 불어넣는 물결 같았다. 이 작은 글자들은 서로 어우러지고, 감정을 공유하며 끝없는 연결망을 형성했다.
“자, 이 ‘ㄱ’ 자 보세요.” 시온은 천천히 글자 정령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ㄱ’은 강한 빛을 내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가족’, ‘걷다’, ‘감사’ 같은 단어들을 통해 마음과 손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해왔죠. 이 하나의 글자가 빠지면 한마디가 아주 달라져서 뜻이 무너질 거예요. 잊힌 언어 속에도 나 같은 글자가 있었는데, 누군가 그 글자를 몰라서 말을 잃었죠.”
아이들은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느꼈지만, 곧 수업의 핵심으로 다가가는 문제에 부딪혔다. 바로 ‘사라진 언어’, 즉 더 이상 쓰이지 않거나 잊힌 말들 속에 존재하던 글자와 단어들이 ‘잠들기’ 시작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잠듦’은 영원한 침묵이 될 수도 있었기에, 보존소는 매일 밤 불려온 언어의 조난자들이 깨어나도록 도와주는 곳이었다.
“잠든 언어들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와 같아요. 그 세계에서 누구도 자신을 되살리지 않으면, 점차 흐릿해지다가 완전히 사라지고 말죠. 그 마음의 빈자리는 결국 우리 마음속의 소통 불능의 공간이 돼요.” 시온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과제를 제시했다. “우리 각자가 이 보존소에서 잠든 한 단어의 한 글자를 맡아, 그 글자 안에 담긴 역사를 이해하고, 그 글자가 주는 느낌을 몸으로 표현해 봅시다.”
아이들은 손을 맞잡고 보존소 내부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곳 벽과 바닥 곳곳에는 옛 서체가 살아 움직이듯 떠다녔고, 낡은 책들은 바람 소리처럼 미묘한 음성과 리듬을 내뿜었다. 아이들은 신기하게도 각자가 맡은 글자 정령들과 교감했다. ‘ㅂ’은 부드러운 바람 같기도, 단단한 바위 같기도 했으며, ‘ㅅ’은 길고 뾰족한 산들처럼 위태롭고도 아름다웠다. 글자들은 그저 보고, 들리는 것이 아니라 만지고 느껴지는 존재들이 되었다.
조용하지만 긴장된 순간, 한 아이의 손이 떨렸다. 맡은 글자를 떠올리며 “나는 왜 이렇게 작은 글자가 이렇게 큰 힘을 갖고 있나요?”라고 물었다. 시온은 미소 지었다. “그것이 바로 언어의 기적이에요. 하나의 글자는 존재 자체로는 작아 보이지만, 결합하면 풍부한 감정과 의미를 만들어내고, 세상을 이해하는 창이 됩니다. 그 글자가 빠진 단어는 거짓말 같고, 이야기에서 탈락한 친구 같죠.”
그때 보존소 깊숙한 곳, 여기저기서 빛이 깜빡이며 잊히던 언어들의 기척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오래전 소멸 직전까지 갔던 단어들의 형상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며 아이들과 직원들을 향해 다가왔다. 모두의 마음에 뜨거운 희망이 피어났다. “이제 나도 다시 숨 쉴 수 있다!”며 단어들은 기쁨의 춤을 추었다.
하지만 그 순간, 어둠 구석에서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사라진 언어들을 잠재우는 ‘침묵의 그림자’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은 ‘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생겨난 낡고 무심한 마법으로, 언어를 갉아먹고 꺼지게 만드는 무형의 적이었다. 침묵의 그림자가 보존소에 닿으면, 다시 한 번 수많은 언어들이 영원히 지워질 위기에 처했다.
시온은 숨을 고르고 단호하게 말했다. “한 글자라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우리가 지켜야 해요. 이곳의 모든 글자, 단어, 언어들 모두가 우리와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요. 오늘 우리가 경험한 한 글자의 가치, 그 힘은 바로 이 위기 속에서 우리를 구할 열쇠가 될 거예요.”
아이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노력과 용기를 다해 ‘한 글자의 부활 의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ㄱ’이 소리내어 외치고, ‘ㅏ’가 밝은 빛을 내며, ‘ㄴ’과 ‘ㄷ’이 힘을 합쳐 하나의 언어가 거대한 파도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 침묵의 그림자가 점점 후퇴했다. 그러나 이 싸움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는 아니었다. 아직 어딘가 깊은 곳에서는 다른 언어들이 잠들어 있었고, 또 다른 침묵의 손길이 그들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잠자는 언어 보존소에서의 이 특별한 수업은 한 글자의 소중함과 언어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고 연결하는 세계에서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시작될 모험을 암시하며, 아이들과 직원들이 새로운 여정을 준비하는 모습을 남긴 채 한 조각의 빛이 저 멀리서 번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