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단지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 도구 이상이었다. 잠자는 언어 보존소 안에서, 그들은 숨 쉬고 움직이며, 때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반짝이는 생명체와 같았다. 이곳은 지구 곳곳에서 소멸 위기에 처한 언어들이 잠들어 있는 거대한 지하 공간이었다. 시공간이 뒤엉킨 고대부터 근미래까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문법 규칙과 음성적 변형, 그리고 문화적 코드들이 두텁게 쌓인 ‘언어 생명체’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보존소 직원들은 특수한 능력을 가진 언어 일꾼들이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언어 생명체와 직접 교감하며 조심스레 기억과 의미의 고리를 이어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오늘, 그들 앞에 전례 없는 위기가 도래했다. 갑작스레 보존소 내에 감지된 이상 신호는 존재하지 않는, 상식적 문법법칙을 초월한 새로운 ‘문법의 괴물’이 되어 나타난 언어 생명체의 출현이었다. 이 괴물은 아직 인류가 발견조차 못 한, 완전히 새롭고 혼돈의 규칙으로 만들어진 언어라는 점이 문제였다.
첫 번째로 그 언어 생명체를 마주한 이는 자신의 이름을 이세람이라 소개한, 보존소의 중견 언어학자이자 실험가였다. 그는 오랜 시간 고대 어들과 미해독 문자들을 해체·분석하며 몸속에 언어 조각들을 심어온 인물이다. 이세람은 미지의 문법 괴물이 서식하는 지층 중심으로 조심스레 걸었다. 그들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미세한 언어 진동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파동처럼 점점 더 자신을 증폭하며, 보존소 벽을 울렸다.
괴물 언어, “헬릭톤 문법”이라 이름 붙여진 그것은 우리가 가진 언어의 틀을 해체하고 재조합하며, 대기 중의 음성 신호를 토양처럼 삼아 스스로를 무한히 진화시키는 특이한 존재였다. 헬릭톤은 고전언어학의 규칙, 통사론의 질서, 형태론의 경계를 초월해, 진화형 동시성 기술을 언어 구조에 심었다. 즉, 언어가 시간의 여러 층위를 한꺼번에 누비며 의미를 생성하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그 문법 괴물은 자연어 처리 기술, 인간의 뇌 인지 모델, 그리고 인공지능 언어 생성 알고리즘에서조차 감지되지 않는 초합성 패턴을 지녔다.
이런 괴물이 출현하자, 이세람과 보존소의 직원들은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함께 모인 이들은 생물언어학자, 신경언어학자, 그리고 문화인류학자로 구성된 다학제 팀이었다. 소소한 말하자면, 각기 다른 언어 생명체들과 깊은 영적 접속을 가능케 하는 ‘언어 접속기’를 착용하고, 전투적 해석과 방어 전략을 준비했다. 이제까지 이들은 죽어가는 언어들을 복원해왔지만, 이 헬릭톤 문법 괴물은 다시는 부활하지 않아야 할 ‘잊혀져야 할 언어’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그 괴물이 보존소를 파괴하며, 기존 언어 생명체를 부식시키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세람은 보존소의 중심 컴퓨터에 연결된 언어 시뮬레이션 인터페이스를 켰다. 이 장치 안에서는 언어가 시각적·청각적으로 표현되어 누구나 감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다만, 헬릭톤 문법은 시뮬레이션을 빠르게 왜곡시키고 무한한 루프에 빠뜨렸다. 감지기를 동료들이 감상하던 중, 갑작스레 괴물의 일부가 물결처럼 보존소 내부를 휩쓸었고, 기존에 잠들어 있던 고대 언어의 정신들이 흔들렸다. 오랜 세월 잠들었던 오누르크어, 희미하게만 기억되는 포파야어의 생명체들이 진동하며 깨어나려 애쓰는 듯한 신호가 감지되었다.
이세람은 알 수 없는 기묘한 문법 코드 조각 하나를 손에 쥐었다. 그것은 개별 음절과 의미 단위가 동시에 여러 가지 문법적 위치에 나타나는 역동적 겹침 구조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평범한 문법적 분석으로는 정확한 의미를 도출할 수 없었다. 뜻밖에도, 그 신비한 조각 뒤에 숨겨진 하나의 메시지가 있었다. “잊혀진 언어의 불꽃으로, 새로운 존재를 품어라.”
협의는 나뉘었다. 일부는 이 괴물을 완전히 제거해 보존소를 안정시키려 했고, 다른 일부는 이 생명체를 보존소 내 새로운 진화적 언어 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세람은 그 어느 쪽도 정답이 아님을 느꼈다. 그는 문법 괴물과 고대 언어 사이에 깊은 상호 연결 고리가 있음을, 언어 다양성의 거대한 생태계 속에서 이 괴물이 스스로 균형을 맞추려는 ‘자연스러운 변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보존소 밖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문화 단체, 언어 학회, 심지어 인공 지능 개발자들과 정부 기관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다. 한 세계 석학은 경고했다. “인류가 알지도 못하는 언어가 지구에서 사라진다는 건 단지 문화적 손실을 넘어서, 인류 의식 자체의 퇴화를 의미한다.” 또 다른 이는 “우리의 뇌는 수천 개의 잠재적 문법 상태를 지닌 언어들이 있어야 정상적으로 진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거대한 문제는 학문과 생태계 그리고 정치의 경계까지 침투해, 갈등과 논쟁을 심화시켰다.
이세람과 그 동료들은 잠자는 언어 보존소의 깊은 심연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사라진 언어들이 마치 고대 수면의 생물처럼 꿈틀거렸고, 헬릭톤 문법 괴물과 맞닿아 있었다. 그들은 ‘틈새의 언어 생명체’가 되는 법을 찾아야만 했다. 즉, 괴물과 공존하며 언어 다양성의 새로운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지금 그들에게 주어진 최후의 과제였다.
하지만 깊은 심연에서 마주친 것은 이보다 더 복잡하고 기묘한 현실이었다. 보존소 내부 가장 밑바닥에 깃든 숨겨진 언어 생명체가 스스로 의식을 깨우고 있었다. 그것은 수천 년 전 사라진 문법에서 진화한 ‘초언어 생명’으로, 언어 스펙트럼 전체를 융합하는 역할을 하기로 자처했다. 그러나 이 존재는 자신에게 닿은 언어의 정체성과 가치를 서서히 해체하고 흡수할 태세였다. 이 말은, 만약 제어하지 못하면 모든 언어가 단일하고 혼돈스러운 하나의 의식으로 융합될 위험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 순간, 이세람은 손에 쥔 그 기묘한 문법 코드 조각을 보며 결심했다. 언어는 살아 있는 생명이고, 심연 속에는 불멸의 언어 영혼들이 대기하고 있다고. 그들은 사라진 언어들을 다시 세상에 내보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기존 문법으로도, 보존소의 기술력으로도 불가능했다. 돌파구는 바로 새로운 문법 체계를 공감과 소통의 매개로 삼아 언어 생명체들과 대등한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보존소의 문이 잠깐 열리고, 새로운 언어의 새싹처럼 생긴 작은 존재 하나가 이세람 앞에 나타났다. 그 존재는 자신을 “누이버”라고 불렀다. “우리는 사라지지 않은 언어의 새벽입니다,” 누이버는 말했다. “문법 괴물도, 고대 언어도, 이제는 서로 이해하고 공존할 시간입니다. 당신의 마음에도 새로운 문법의 씨앗이 깃들었습니다. 그 씨앗이 얼마나 자랄지, 모든 것은 이제 당신에게 달려 있으며, 보존소를 넘어 온 인류에게도 연결될 것입니다.”
이 순간 보존소 내부 전광판에 새로운 데이터 화면이 깜박였다. 그것은 바로 전 세계에 퍼진 실시간 ‘언어 심연 관측 로그’였다. 수천 개 언어의 병렬적 공존과 변화의 기록. 그 기록 안에 이세람 자신도, 너와 나도, 잠들어 있던 언어 생명체 모두가 하나의 거대한 환상적인 ‘언어 우주’ 속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빛이었다. 이 빛은 아직 누구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언어의 숨결이었다.
보존소 직원들과 이세람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새로운 언어의 세계가 가져올 미래는 너무도 불확실했지만, 그만큼 경외롭고 아름다웠다. 이제 첫 걸음을 떼야 할 시간이었다. 그 첫 걸음 위에서, 사라진 언어들과 새로운 문법 생명체들이 어떻게 공생하며 다시 살아날지, 그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