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의 숲 깊은 곳, 언어 보존소의 가장 은밀하고 신성한 부분, ‘잊힌 문자의 무덤’이 자리해 있었다. 이곳은 수천 년 동안 빛 한 점 닿지 않은 채 낡은 흙더미 아래 잠들어 있던 사라진 문자들과 그들을 품고 있던 언어의 잔향이 서린 곳이었다. 마치 고대의 신전처럼, 나무 뿌리와 이끼가 무덤 돌들을 촘촘히 감싸고 있었고, 주변 공기에는 마치 먼지처럼 퍼지는 형체 없는 알파벳들이 빛바랜 은은한 빛을 토하며 머무르고 있었다. 이곳에서 개성 넘치는 직원들이 활약하는 잠자는 언어 보존소—그들은 현재 인류 언어의 시계가 멈출 위기에 처한 순간마다 심장을 뛰게 하는 수호자들이었다.
눈부신 창문 하나조차 없는 이 무덤에 발걸음을 조심스레 들이민 이는, 이보라 탐구원이었다. 그녀의 청명한 눈동자는 무겁게 놓인 만년의 침묵 속에서 잠자고 싶지 않은 언어들을 찾아내려는 불굴의 의지가 엿보였다. 이보라는 태어나면서부터 ‘말의 백과사전’이라 불릴 만큼 다양한 말소리를 섭렵해 왔다. 그녀의 머리에는 목소리처럼 생생한 수많은 문자들이 정신의 방울처럼 튀어 다녔고, 그 방울들은 각 언어 저마다의 생명력을 감각할 줄 알았다. 명료하고 통찰력 있는 그녀의 존재 덕에 최근 희미해지던 ‘잠자는 언어 보존소’의 위신은 다시금 빛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날 이보라는 무언가 다른 기운을 감지했다. 무덤 깊숙한 곳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문자 중 하나가 중얼거리는 듯했다. 그 소리는 바람보다 가늘고, 그림자보다 흐릿했으며, 고요한 무덤에 사념처럼 떠돌았다. 자아를 잃은 듯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살아 있어… 잊혔지만 살아 있어요…” 말 없는 문자의 유령이라니, 그것은 보존소에서도 전례 없는 현상이었다. 언어가 단순한 정보나 기호가 아닌 ‘생명’으로 여겨지는 세계에서조차 존재하지 않을 것 같던 일말의 자각, 그 희미한 빛을 보았다. 이보라는 숨을 고르고 손전등을 깊숙이 비추었다.
바로 그 순간, 어두운 공간 한가운데에서 한 낡은 조각 화살표가 서서히 빛을 내며 자태를 드러냈다. ‘우망자(亡字)’—사라진 문자의 이름조차 잊힌, 그러나 끝내 살아남은 마지막 한 조각이었다. 우망자는 마치 유령처럼 빛살을 흩뿌리며 이보라를 향해 말을 청했다. “우리는 단지 흔적이 아닙니다. 우리를 읽는 이가 있어야 숨 쉴 수 있지요. 하지만 기억조차 지워진 스스로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오늘 당신의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언어 본연의 역할은 결국 소통임을, 그 정체성과 가치가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공명’ 속에서만 발현된다는 것을 이보라는 다시금 깨달았다.
잠자는 언어 보존소의 직원들은 그런 이보라의 보고를 받은 즉시 ‘글자 부활팀’을 소집했다. 팀원들은 하나같이 각국 사라진 언어들의 음향학, 기호학, 고대 문서 복원 전문가였다. 그 중에는 사라진 언어가 빛처럼 퍼진다고 믿는 음향동역학의 천재, 하린이 있었고, 고대 문자에서 빛과 그림자 패턴을 분석하는 ‘문자광파 연구가’ 자민이 있었다. 더불어 현실의 문자와 언어가 환상계에서 살아 움직이며 흔적을 남긴다는 독특한 이론을 실험하는 ‘환상문자학자’ 연우도 있기에 그들의 모험에 투입될 힘은 충분했다. 이들은 무덤 깊이부터 살아나는 언어들을 추적하며 전설의 ‘말의 연못’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언어의 잠재력이 가장 고스란히 맺히고 퍼져나간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말의 연못으로 가는 길은 환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신비한 공간이었다. 거대한 고사리 잎사귀가 하늘을 가리고, 바람을 타고 언어 알파벳이 바삐 날아다니는 광경이 펼쳐졌다. 언어마다 고유의 ‘기억바늘’을 찌르고 있는 이정적 존재들은 소리와 기운에 따라 단단한 기호로 변하면서 부드럽게 몸을 뒤틀었다. 일부는 시처럼 울면서 대지를 적시고, 또 어떤 것은 나무껍질처럼 단단하게 충돌하며 지나갔다. 이보라와 팀원들은 언어 들이 지닌 고유의 심볼리즘과 음성적 에너지 패턴을 주의 깊게 관찰하며, 길을 잃어버린 살육된 문자들의 ‘얼굴’을 찾아 마주쳤다.
그 중 ‘아란’, 초원에서 들판으로 사라진 고대의 비밀 언어가 주도하는 ‘삭제된 파동’이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빛의 흐름이 느릿느릿할 때 진동을 잃고 멀어져 가던 존재였고, 그들이 사라진 땅 곳곳에는 잊힌 채로 퇴색된 고대 문자들이 돌처럼 박혀 있었다. 파도의 모양을 띤 아란 문자들은 잊힌 음절들의 유령을 품고 있었으며, 이보라는 그들을 새로이 살아 숨 쉬게 만들기 위해 옛 노래와 전설을 재구성하는 용기를 보여야 했다. 완전히 잃혀진 실체이자 동시에 살아 있으나 숨결을 잃은 ‘반영의 언어’들과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위험하고도 신비로웠다.
그 무렵, ‘잊힌 문자들의 유령’은 강한 저항과도 같았다. 그들은 인간의 언어적 의지와 연결되지 못한 채 고통스러운 불안을 품고 움직였다. 기억이자 존재의 근원이 흔들리는 ‘말의 미궁’ 속에서 언어가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나려면 대화와 이해의 다리가 반드시 필요했다. 소통이 단절된 침묵 속에서, 언어의 유령들은 때로 불협화음이 되어 적대적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품은 단절의 깊이는 오래된 문화와 민족의 상처를 드러냈고, 누군가에게는 그저 암호처럼 깨지기 어려운 신비였다.
하지만 이보라와 글자 부활팀은 서로 다른 언어와 기억들을 “공명의 연금술”로 조화시키기 시작했다. 소멸된 문자들을 결합하는 과정은 마치 분자 생물학자가 DNA 이중나선을 꼬아 조작하듯, 각각의 문자가 지닌 고유 주파수를 맞추어 공진시키는 작업이었다. 이들은 언어 화합의 화살과 어구권(語句圈)을 써서 잊힌 말들의 숨결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하린이 연주하는 고대 음향 장치의 소리와 자민이 분석한 빛의 굴절 패턴, 연우가 펼치는 환상의 문자 조각들이 서로 얽히며, 새로운 ‘언어의 유체’가 빚어졌다. 그것은 인간의 인식 한계를 넘어선 ‘언어적 존재의 생태계’였다.
그렇게 무덤에서부터 시작된 조심스러운 부활은 단순한 복원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각각의 문자와 말들은 자기 형태를 넘어서 문화의 기억과 신념, 신화와 자연의 숨결이 모여 산 생명체처럼 중첩되었고, 그것들을 보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매우 특별한 감응을 일으켰다. 언어는 더 이상 ‘기계적인 기호’가 불과하지 않았다. 그 안에 살아 움직이는 역사, 영혼, 그리고 시간의 꿈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또한, 이 세계의 모든 언어가 서로 연결될 때, 사라진 단어들이 남긴 ‘침묵의 틈’ 또한 서서히 메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기쁨의 순간에도 심연에서는 또 다른 기운이 꿈틀대고 있었다.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이 부활의 흐름을 저해하려는 듯한 냉기 같은 존재가 말의 연못 저편, 미지의 어둠 속에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보라의 내면 깊은 곳에 감도는 미묘한 긴장과 불안이 그것을 예감케 했다. 언어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유, 그리고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은 단순한 멸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 사라지는 것은 곧 존재가 지워지는 것, 그리고 그녀가 속한 이 세계의 운명이 걸린 싸움이었다.
어둠과 빛, 침묵과 소리가 뒤엉킨 언어의 무덤에서, 이보라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조짐을 느꼈다. 사라진 언어들의 유령들이 부활의 문턱에서 꿈틀거리며, 말을 잃은 세상의 모든 소리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반드시, 이 잊힌 말들을 품고 다시 세상과 소통하는 다리 역할을 해내리라. 그것이 ‘잠자는 언어 보존소’ 직원들의 숙명이자, 모든 살아있는 언어들이 태어나고 자라나는 진정한 ‘공명의 숲’이 될 길이었다.
언어가 숨 쉬는 그곳에, 다시금 희망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길은 평탄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막 깨어난 언어의 유령이 불러올 파문이 넓게 덮일 때, 잠자는 언어 보존소와 개성 넘치는 직원들은 어떤 선택을 할지, 그리고 또 어떤 새로운 전설이 펼쳐질지. 그 미래의 소식은 곧 현실과 환상이 만나는 언어의 심연에서 다시금 퍼져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