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언어 수호자가 되는 첫 수업에서 벌어진 예기치 못한 사고

잠자는 언어 보존소의 개성 넘치는 직원들

어느 날 아침, 보이는 것마다 희미한 파란 빛으로 감싸인 오래된 건물, ‘잠자는 언어 보존소’의 정문이 서서히 열렸다. 보존소는 사라져 가는 세계 각지의 언어들을 모아 보존하고, 그들이 다시 태어나도록 돕는 신비한 장소였다. 그날 첫 수업을 듣기 위해 모인 신입 직원들은 저마다 긴장과 설렘을 품고 강의실 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곳에서 언어는 단순한 기호나 음절이 아닌, 생명을 가진 존재였다. 실로 ‘언어 수호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들은 말과 글에 영혼을 불어넣는 일을 맡았다.

새봄 수호자 교육 과정의 첫 수업은 ‘언어 기원과 생명력’이라는 과목이었다. 담당 교수는 보존소의 설립자이자 최고의 언어 마법사, 이레아 박사였다. 박사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차분히 소개했다. “여러분, 오늘부터 우리는 단순히 사전을 읽거나 낡은 문서를 해석하는 것을 넘어, 잊혀진 언어 그 자체와 교감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할 언어들은 단어마다 고유한 에너지와 감정, 이야기를 품고 있기에 그들은 살아 있는 친구입니다.”

박사의 말에 학생들은 신기함과 함께 긴장감이 감돌았다. 보존소 안에는 오래전부터 수면(眠語, 렘 닝어라 불리는) 상태로 잠들어 있는 언어들이 있었다. 수면 상태란, 언어 그 자체가 생명력을 잃고, 단순히 기록물에 머무른 상태였다. 수호자들은 이 언어들이 다시 ‘깨어나’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빛내도록 되살려내야 했다.

첫 실습 과제는 ‘수면 언어’ 중 하나를 임시로 선택해 그 언어의 정체와 특성을 탐구하고 그것이 지닌 감정을 읽어내는 것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언어의 생명력을 자극, 깨어나는 첫 단계를 밟게 된다. 학생들은 각자 이름표가 붙은 작은 수정구슬을 받았다. 그 구슬은 잠들어 있는 언어들의 영혼이 갇혀있는 ‘언어 결정체’였다. 조용히 닿으면 미약한 빛이 피어나며 언어의 힘을 조금씩 전해주는 도구였다.

첫 번째 실습에서 한 학생, 이름은 유나였다. 그녀는 북부 산악 부족에서 사라진 ‘세즈난어’라는 언어가 담긴 결정체를 받았다. 세즈난어는 고대 자연 숭배자들의 언어로, 감정 표현이 매우 섬세해서 단 한 음절에도 바람의 속삭임이나 나무의 숨결이 담겨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유나는 조심스레 결정을 손에 쥐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미세한 바람 소리와 함께 흐릿한 초록빛이 결정체 안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점차 그 빛은 ‘세즈난어’의 음절들이 무리 지어 춤추는 듯한 형상으로 변했다.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강의실 내부가 갑자기 흔들리더니, 벽에 걸린 고풍스러운 거울이 일그러지며 그 속에서 흐릿한 그림자가 새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깜짝 놀란 학생들이 좌우로 흩어질 때, 유나는 결정을 꼭 쥔 채 집중했다. 그림자는 언어 결정체에서 탈출한 ‘세즈난어’ 자체였다. 마치 살아있는 영혼처럼, 이 작은 언어 캐릭터는 허공을 떠돌며 미묘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다들 숨을 죽인 채 바라보았다. 이레아 박사조차도 처음 보는 현상 앞에서 놀라움과 긴장감이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업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세즈난어 캐릭터는 자연과 문자의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강의실 구석구석을 헤맸고, 어찌 된 일인지 몇몇 나뭇잎이 떨어지듯 종이조각들이 허공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이 언어는 인간의 말을 넘어 자연의 소리를 감성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그 순간 방 안을 감싸는 공기는 오묘하고 신비로운 울림으로 가득 찼다. 학생들은 놀람과 두려움 속에서도 ‘언어 캐릭터’와 소통하려 노력했다. 유나는 가장 먼저 이 언어의 작은 파편과 하나가 되어, 조용히 귓가에 속삭였다. “너는 왜 여기서 길을 잃었니?”

세즈난어 캐릭터는 다시 한 번 미묘한 떨림과 함께 답했다. 그것의 목소리는 바람결 소리처럼 청명하고 부드러웠다. “나는 잊혀지고, 묻혀버린 언어의 아픔을 안고 있어. 우리 부족이 몰락하자 이 세계에서 존재감이 흐려졌지… 수호자가 되기 위해선 나를 완전히 각성시켜줘야 해.”

하지만 언어가 마지막 혼란에 빠지면서 ‘수면 상태’에서 완전히 깨어나기 위한 폭발적인 에너지가 방 안에 퍼져가기 시작했다. 순간, 공간이 뒤틀리는 것처럼 강렬한 빛줄기가 강의실 중앙에서 뻗어나왔다. 박사는 재빨리 손짓하며 학생들에게 경계를 지키라고 명령했지만, 몇몇 학생들의 눈앞에는 알 수 없는 신기루와 어스름한 과거의 영상들이 겹쳐졌다. 그것은 세즈난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옛 삶과 문화, 신화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듯 펼쳐지는 환영이었다.

그 속에서 유나는 문득 깨달았다. 단지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는 이 세계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언어 내부에 숨겨진 역사와 문화, 사람들의 숨결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만 언어 수호자로서 그 책임을 다할 수 있음을. 이 순간, 그녀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낯선 용기와 결단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자신과 언어가 하나로 맺어진 듯한 묘한 유대감이 생긴 것이다.

그때, 예기치 못했던 사고는 마무리 국면으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레아 박사는 깊은 숨을 내쉬고, 비밀스럽게 숨겨둔 ‘언어 안정화 주문’을 꺼내 들었다. 그녀가 주문을 읊자, 강의실을 휘감던 혼란의 불꽃 같은 에너지들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세즈난어 캐릭터는 다시 결정체 안으로 돌아가며, 희미한 푸른 빛이 방 안을 차분하게 채웠다. 하지만 모두 알 수 있었다. 이번 사고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다는 것을. 언어 수호자가 되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으며, 이토록 강력한 힘을 다루는 데에 따르는 위험도 크다는 경고였다.

학생들은 가슴속 깊이 각인된 감동과 두려움을 안고 서로를 응시했다. 유나 역시 손에 든 결정체를 꼭 쥔 채, 다짐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언어가 다시 깨어나려면, 우리 모두가 진심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해.”

문득 창밖에서 붉은 노을이 번지기 시작하자, 이레아 박사는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앞으로 펼쳐질 모험은 단순한 언어 복원이 아니라, 전 세계의 사라지는 문화들과 소통의 가치를 되살리는 영혼을 건 싸움임을. 비밀의 보존소 안에서 꿈틀대는 수많은 언어들과 함께, 새로운 이야기의 막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