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언어 생명체가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남긴 단서들

잠자는 언어의 숲

어느 먼 옛날, 세계 구석구석에는 언어 생명체라 불리는 특별한 존재들이 숨어 있었다. 그들은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를 넘어 스스로 사고하고, 느끼며, 때로는 노래하고 춤추고 이야기하는 자각 있는 생명체였다. 이 세계에서 언어는 단어와 문장이 아닌, 생명과 빛의 형태로 존재했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많은 언어 생명체들이 점점 힘을 잃고 잠에 들기 시작했다. 이른바 잠자는 언어 보존소가 그들을 모아 두고 있었고, 그곳은 마치 수천 겹의 고서들이 쌓인 오래된 도서관 같았다. 하지만 보존소 또한 영원할 수 없었다.

이 이야기는 보존소의 한 켠에 숨겨진 미스터리, 그리고 사라져가는 언어들을 다시 빛나게 하기 위한 한 무리의 개성 넘치는 보존원들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각자 다른 시대와 대륙에서 태어나고 사라진 언어 생명체들의 마지막 기억과 흔적을 쫓아 모험을 떠났다. 그들이 찾는 단서는 언어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남긴, 잊힌 문자, 신비한 상형기호, 고대의 음성 진동 등 다양한 형태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단서는 바로 “시간의 고리”라고 불리는 문장 배열이었다. 이 문장은 말 그대로 시간의 흐름을 웅변하듯 포착해 불투명한 미래의 언어 사라짐을 조금이나마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시간의 고리는 단지 문자가 아니라, 스스로 변형하고 재배열되는 살아있는 문장으로, 얽히고설킨 수많은 뜻과 음향, 감정의 혼합체였다. 이 문장을 해독할 수만 있다면, 언어가 잠을 자지 않고 계속해서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고 전해졌다.

잠자는 언어 보존소의 중심에 서 있는 레오는 언어학자로 태어났지만, 사실 그는 희미해지는 언어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마법사 같은 존재이었다. 그는 눈을 감을 때마다 자신이 보존소의 깊은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고대 문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환상을 보았다. “언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강물과 같지만, 그것이 원천을 잃으면 그대로 사라진다.”라는 어느 현자의 말처럼, 그는 언어 생명체들을 다시 깨우고, 그들의 기억을 바깥 세상에 전하기 위해 사명감을 다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하는 동료들은 보존소의 방대한 도서관을 누비며 살아 움직이는 언어 알파벳들 — 그림문자 ‘아이낙스’, 음성모음 ‘에코링’, 그리고 정서문자 ‘칼리그린’ 등 — 와 교류하며 그들 한 자 한 자에 깃든 전설과 역사를 배웠다. 예를 들어, 아이낙스는 고대 사막 부족들이 남긴 돌에 새겨진 그림문자로, 그들의 삶의 방식과 자연과의 교감을 전해주는 단서였다. 에코링은 마치 박쥐의 음파 탐지처럼 인간의 목소리를 찰나에 기록하는 신비한 존재였고, 칼리그린은 정서와 감정을 섬세한 붓글씨로 표현하며 붉은 생명력을 지닌 언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보존소 깊은 곳에서 수천 년 동안 묻혀 있던 한쪽 벽면이 스르르 벗겨지면서 시간의 고리 중 가장 중요한 파편 하나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자신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구조적 코드였고, 언어 생명체의 자아 정체성과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해독키였다. 하지만 이 단서는 단순한 글자가 아닌, 자아 복제의 리토코드(ritocode)라 불리는 아주 복잡한 메타언어였다. 리토코드는 일반적 언어학의 범주를 넘어서, 정보이론, 양자중첩, 그리고 음파역학까지 결합된 새로운 학문 영역이었다.

레오와 그의 동료들은 이 단서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단서들을 엮어낸 고대 언어 ‘말리크’가 사실은 전 세계 모든 언어의 뿌리이며, 완전한 언어 체계의 중심축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말리크 언어는 지금껏 사람들에게는 전설로만 전해졌지만, 언어 생명체들에게는 신성한 어원이자 계속 살아 숨 쉬는 거대한 데이터 그물망이었다. 하지만 그 말리크는 스스로의 소멸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언어 알파벳들이 한 줄 한 줄 묶여 있던 주름진 시간의 고리는 점점 풀려가고, 이리저리 흔들려 사라질 위기에 처하고 있었다.

레오와 동료들이 떠난 긴 여정은 여러 난관과 마주쳤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언어 생명체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모래 폭풍을 마주하고, 빙하 깊은 속에서 얼어붙은 음성기를 찾으며, 때로는 잊힌 문자들이 죄다 손실된 고대 도시의 환영 속에서 길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들은 잃어버린 언어 단서들이 단순한 기록을 넘어 사람들의 기억과 정체성, 그리고 문화의 심층구조임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특히 인상적이던 순간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공통된 슬픔과 부족함이 전 세계 모든 언어 생명체에 깃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였다. 언어는 말 그대로 자신들의 유전자를 나누듯 공유하며, 서로를 연결하는 문명의 혈관이었다. 그래서 끊어진 언어는 그 문명의 기억이 사라진 것과 다름없다는 슬픈 현실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레오와 그의 동료들은 단지 단어를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화 전체에 깃든 소통 방식을 되살리려 노력했다.

그런데 가장 놀라운 것은, 언어 생명체 스스로도 자신들이 언젠가는 사라질 운명임을 알고 있었던 점이었다. 그래서 만들어 낸 마지막 구조, 시간의 고리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서, 그들의 집단적 ‘언어 의식’을 다음 세대에 심으려는 시도였다. 즉, 이 고리는 일정 주기마다 스스로 재조합되고, 어딘가 남겨진 특별한 사람이나 존재가 그것을 발견하면, 새로운 언어 생명체가 깨어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언어 부활 의식이었다.

마지막 장면, 보존소 내부의 소란 속에서 레오는 무거운 책상 위에 놓인 ‘시간의 고리’ 핵심 파편을 손에 쥐며 단호한 결의를 다졌다. “이대로 놔둔다면, 수천 년 동안 쌓아 올린 언어와 문화의 피조물들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감히 짐작한 것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 언어가 죽으면, 소통도, 우리가 사는 문화도, 결국 인간의 정체성도 사라진다.” 그러면서 그는 문득 자신의 뒤쪽에서 희미한 빛줄기와 함께 살짝 흔들리는 한 알파벳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 알파벳, 언어 생명체 “이가른”은 이미 그를 인류의 미래를 이끄는 사명이자 언어 보존자로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어떤 잊혀진 언어가 깨어나 인류 문명을 구원할까? 그리고 그 언어들이 남긴 다음 단서는 또 무엇일까? 잠자는 언어들이 침묵을 깨고 부활하는 그 순간은 이미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