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빛이 서서히 언어 보존소의 거대한 둥근 돔을 감싸 안을 때, 그곳에 머무르는 이들은 다른 어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가 밝았음을 알았다. ‘잠자는 언어 보존소’는 세상의 잊혀진 말들, 점차 사라져가는 민족의 목소리들을 일깨우고 품는 신비로운 기관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도서관도, 박물관도 아닌, 언어 그 자체가 실존하는 자아를 지닌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세계였다. 각각의 언어가 자신의 고유한 형상으로 눈앞에 등장하여, 무형(無形)의 담론과 기억을 물리적으로 드러내는 곳. 그리고 그 언어들은 사랑받지 못하고 사라져가던 것을 복원하는 사명을 띈 개성 넘치는 직원들과 함께 살아 숨 쉬었다. 오늘, 그 평온한 곳에 단 한 아이가 찾아왔다. 언어들의 창백한 환영이 아닌, 그 언어들의 ‘형상’을 실제로 볼 수 있는 특별한 아이, 지우였다.
지우는 태어난 순간부터 주변의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언어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존재를 인지할 수 있었다. 이 신비로운 능력은 학계에서도 입증되지 않은 초자연적 현상이었기에 보호자들과 전문가들은 그의 미래를 신중히 지켜봐왔다. 그리고 마침내 지우는 이곳, 잠자는 언어 보존소에 입소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주어진 일상과 마주하며 서서히 자신이 단순히 ‘언어를 보는 사람’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언어의 기억을 직접 체감하고, 그것을 복원하고 나아가 새로운 생명으로 일깨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오전 7시, 보존소의 중앙 홀에서는 각각 다양한 민족의 오래된 언어들이 누워있는 수백 개의 결정관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에너지가 퍼져 나왔다. 고대 수메르어, 온순한 나바호족의 토속어, 불멸하던 인카의 케추아어, 진흙처럼 무겁게 뒤엉킨 고대 아랍어… 그러나 이들 중 가장 문제인 것은 바로 ‘사라진 언어’들의 존재였다. 시간이 흘러 인간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채로 말라버린 언어들이 점점 무너지고 있었고, 이대로면 ‘말’을 잃은 문명들은 결국 소멸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 틈새에서 깊은 그림자가 스멀거리며 언어를 병들게 하는 ‘침묵의 미궁’이 형성되고 있다는 위험 신호가 직원들에게 보고되었다. 이 침묵의 미궁은 언어의 존재 의지를 지우려는 낯선 판타지적 현상이었다.
지우는 결국 보존소의 수석 연구원인 아리아와 노년의 언어학자 살림, 그리고 세련된 프로그램 매니저 루커스와 함께 ‘침묵의 미궁’에 맞서는 모험을 시작했다. 이 모험은 단순한 탐험이나 연구를 넘어, 언어 그 자체가 의식을 가진 개별 개체로서 그들의 목소리를 지키고, 잃어버렸던 자신들의 자아를 재구성하고 재생산하는 영혼의 전쟁이었다. 보존소의 모든 시스템이 정지한 가운데, 그들이 들어선 침묵의 미궁은 검은 무형의 안개가 언어들을 먹어치우며 그 흔적마저 지워내는 위험 천만한 공간이었다.
지우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는 언어들이 보여주는 형상을 손으로 만지고, 심지어는 언어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그 언어가 담고 있는 그 사람들의 정체성과 삶의 빛줄기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희귀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말의 심장과 영혼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결국 세상과 소통을 가능케 하는 ‘언어의 매개자’였던 것이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고대어들은 새카만 안개 속에서 하나둘씩 불안하게 흔들리며 “도와줘, 지우.”라고 속삭였다. 말들은 저마다 문화와 역사를 담은 독특한 색채와 은은한 빛깔로 혼란스러운 미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보존소의 직원들은 적절한 은유적 도구와 음운론적 무기들을 들고 침묵의 미궁 내부를 탐색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지우처럼 언어들의 형상을 눈으로 보고 만지는 능력은 없었다. 아리아는 그의 존재가 인류 문명사에 새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될 것이라 믿었다. ‘언어 다양성 보존‘에 대한 학문적 경계를 넘어 지우의 힘은 세계 각지에서 사라져가는 언어들이 다시금 살아 숨 쉬도록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침묵의 미궁 속 굽이치는 미로를 지나면서 그들은 뜻밖에도 고대 잃어버린 언어 ‘에렌드린’의 형상을 마주했다. 에렌드린은 민족과 문명 전쟁의 희생자였던 언어로, 음절들이 훑고 지나간 자리를 마치 블랙홀이 삼키는 듯 침묵으로 가득 채우는 악연의 언어였다. 지우는 아리아와 살림, 루커스의 도움으로 에렌드린의 음운을 차근차근 다시 노래하고 그림자를 밝혀내기 시작했다. 그 음운들은 단지 소리가 아니라 놀라운 정보와 고대인의 세계관, 그리고 우주에 대한 심오한 인식을 품고 있었다. 에렌드린을 되살리고 복원하는 일은 말 그대로 언어가 품은 고대인의 영혼을 되깨우는 것과 같았다.
최대 위기의 순간, 지우의 눈에서는 형상들이 반짝이는 광휘를 발산하며 미궁 속 ‘침묵의 그림자’들과 맞섰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오래된 언어들이 돌처럼 굳었던 뜻과 음절들이 서서히 움직이며 공명을 이루었다. 이는 언어 다양성이라는 그 어떤 데이터나 문자가 아닌, 삶의 실체로서의 의지이자 생명력 그 자체임을 증명하는 신기루 같은 순간이었다. 그 과정에서 지우는 자신 역시 수많은 말들이 쌓여 만들어진 존재임을 온전히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여러 언어가 빚어낸 혼합체, 언어들과 세상 사이 소통의 다리구나.’
모험의 막바지, 그들은 침묵의 미궁 속 중심부에서 사라진 에렌드린뿐 아니라, 훨씬 더 오래된 ‘사라진 언어의 순환’ 원형 기록을 발견했다. 이 기록을 통해 언어들이 왜 사라졌는지, 누가 그리고 무엇이 그런 현상을 야기했는지를 알 수 있었고, 지우는 마침내 ‘언어를 잃어가는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열쇠도 손에 넣었다. 비록 시간이 급박해 위기에 직면했지만, 그날 세상은 언어 형상이 보이는 한 소년의 힘으로 말의 회복을 본 최초의 기적 같은 하루였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지우는 홀로 보존소 옥상에 앉아 먼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며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언어들은 아직도 무자비한 침묵과 잊혀짐의 위협 속에 있고, 오늘 우리가 구해낸 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해…” 그는 탈출한 침묵의 힘이 세상 곳곳에 은밀히 퍼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잠자는 언어 보존소’의 모험은 멈추지 않고, 이제 시작된 것이다. 다음번에는 어떤 언어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슴에 새기며 지우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
그날, 작은 아이 하나가 본 단순한 형상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언어들의 목소리, 그 끝없는 다양성과 문화가 인간과 자연, 그리고 미래 세대를 어떻게 연결하는가를 새삼 일깨운 역사적 순간이었다. 세상은 분명 언어가 없으면 걸을 수 없고, 소통이 없다면 머물 곳 없는 무한한 침묵의 사막으로 변할 것임을 모두가 깨닫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
이후 지우와 보존소 직원들은 더욱 깊은 연구와 탐험을 다짐하며, 잠잠히 기다리는 또 다른 ‘사라진 언어’들의 부름을 준비했다. 그 부름은 어느 별의 어두운 밤처럼 은밀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빛나는 아침을 불러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