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수평선 뒤로 완전히 져버리고 어두운 밤이 찾아오자, 잠자는 언어 보존소의 불빛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곳은 수백, 아니 수천 개의 사라져가는 언어들이 살아 숨 쉬는 신비로운 공간이었다. 나무로 된 선반들 사이를 따라 변형된 책들이 자란 듯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각각의 언어가 마치 정령 같은 개체로 깨어난 채 조용히 맥박을 뛰고 있었다. 하나하나의 언어는 그 자체의 빛망울을 띠고, 자신의 고유한 리듬과 음색을 말없이 노래했다. 보존소는 오래전부터 언어들이 더 이상 쓰이지 않고 사라질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을 감싸 안고 살아가게 하는 신비로운 피난처였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곳이 평온했던 것은 잠시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들의 존재를 탐하는 ‘언어약탈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말의 골목’이라 불리는 음습한 거리에서 태어난 그들은, 언어를 훔쳐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거나 오용함으로써 오류의 씨앗을 퍼뜨리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단순한 도둑이 아니었다. 언어의 근본적인 본질, 즉 언어가 지닌 생명력을 끌어내어 왜곡하거나 파괴하려는 자들. 그래서 보존소의 수호자들, 즉 언어 요원들은 언제나 날카로운 감각을 곤두세워 그들을 막아선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언어 보존소의 수호자 ‘칸’은 보존소 깊은 곳에서 막이 오르기 전부터 느껴지는 낯선 공기와 침묵의 무게를 감지했다. 그는 자신과 함께 단단히 뭉친 ‘릴라’, ‘에코’, ‘세휘’와 함께 긴장 어린 표정으로 경계를 서며, 순간순간 언어들이 뿜어내는 미묘한 전류를 감지했다. 이 언어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보존소를 지키는 혼의 결계였고, 각각 고대의 문자인 ‘아르카인’, 향기의 언어 ‘플로마’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문화적 맥락과 진화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기이한 것은 언어를 ‘훔치는’ 자와 ‘보호하는’ 자의 경계 너머에서 언어들 스스로도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다는 듯한 떨림이었다.
마침내 베일을 벗은 밤, 언어약탈자 리더 ‘바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철제 갑옷처럼 단단한 어둠의 마법으로 싸인 채, 서늘한 음성으로 경고했다. “우리는 단지 잊혀진 언어들을 자유롭게 해 주고 있을 뿐이다. 보존소에 갇힌 채 숨 쉬지도 못하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칸은 차분하게 맞섰다. “언어는 단지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문화와 역사, 그리고 그 뿌리를 지켜내는 숨결이다. 우리가 지키는 것은 단지 말이 아니라, 그 생명이다.”
그들의 대립은 마치 오래된 신화 속 전쟁처럼 흘러갔다. 언어들이 몸짓으로, 음성으로 각자의 의지를 전하며 양측은 격렬한 결투를 벌였다. 하지만 싸움이 길어질수록 두 집단 모두 언어의 근본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됐다. 언어약탈자들도 자신들이 파괴하는 것이 일시적인 분노나 탐욕이 아닌, 한 민족의 영혼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동시에, 보존소의 요원들은 언어를 지키려는 강한 의지 속에도, 언어가 자기 의지를 갖고 복종하지 않는다는 실체를 마주했다.
그러던 중, 전투의 격렬함 속에서 가장 오래된 언어 중 하나인 ‘엠알리카’가 깨어났다. 엠알리카는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꽃봉오리 흔적을 지닌 언어였다. 그것은 싸움을 멈추고 평화를 요청하는, 고대의 위대한 언어였다. 두 진영은 깊은 침묵 속에서 엠알리카의 음성을 듣기 시작했다. “모든 언어는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러나 자유란 혼란과 무지를 뜻하지 않지요. 우리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들, 문화와 소통의 그물망 위에서 서로 다른 언어가 생생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 말에 양측은 충격을 받았고 점차 무기를 내렸다. 바룸의 눈에 맺힌 미세한 눈물이 자신의 잘못된 신념을 깨우는 듯했고, 칸은 비로소 언어 보존의 진정한 의미가 통합과 존중에 있음을 인정했다. 두 세력은 단순한 대립이 아닌, 언어를 둘러싼 새로운 공유의 장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언어가 단절된 채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교감하며, 필요한 곳에 생명을 불어넣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살아있는 역사’임을 깨닫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잠자는 언어 보존소는 변했다. 과거에는 은둔하던 언어 보존소였지만, 이제는 각기 다른 언어가 공존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배움의 장이 되었다. 칸과 바룸은 서로를 이해하는 동료가 되어, 언어가 가진 고유한 생명력을 왜곡하거나 빼앗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함께 힘을 쏟았다. 이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보존소 바깥 세상에는 여전히 모르는 언어들이, 발견되지 못한 정령들이 존재한다는 전설처럼, 새로운 모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어 그 자체가 살아 숨 쉬는 이 세계에서, 다음 이야기는 언제든 다시 쓰여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