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도시 어딘가,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지만, 한 소년은 침묵했다. 이름은 준서. 그는 말을 잃었다. 엄밀히 말하면, ‘언어’를 잃었다. 단순한 실어증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언어가 사라져 버린 듯했다. 말의 뜻은 아득하고, 음성은 무미건조하게 흘러가며, 단어는 마치 심연 속으로 사라진 별처럼 영영 붙잡을 수 없었다. 소년에게 세상은 침묵과 낯선 기호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부모는 걱정했고, 선생님은 답답해했지만, 아무도 이 이상한 현상을 풀 열쇠를 찾지 못했다. 언어란 단지 소통 도구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생명 자체라는 것을 알려 줄 존재도 아직은 없었다. 그런 준서에게 한낮의 햇살이 기묘한 빛을 내는 작은 골목길 끝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준서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도시 외곽의 낡은 도서관 앞을 걷고 있었다. 수많은 먼지가 쌓인 곳, 오래된 책들이 잠들어 있는 그곳에서 그의 눈에 한 권의 책이 들어왔다. 표지는 낡고 찢어졌으나, 표면에서 은은하게 반짝이는 말의 결이라는 문자가 눈길을 끌었다. 마치 누군가가 부드러운 숨결을 불어넣은 듯, 책이 손을 뻗으면 잡힐 듯 다가왔다. 그는 조심스레 책을 펼쳤다.
책장 사이로 희미한 파동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주변 공기가 진동하기 시작했고, 무수한 작은 발자국 소리가 그의 주변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공허했던 준서의 귀에 낮은 속삭임이 스며들었다. 맞았다,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안녕, 준서.”
준서는 깜짝 놀랐다. 말을 잃은 자신을 알고 있다는 듯한 그 목소리에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섞였다. 그러자 앞에 나타난 것은, 마치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단어들과 문장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었다. 글자들이 각자 독특한 생김새와 성격을 지닌 작은 정령들처럼, 바람결에 춤을 추며 빛을 뿜었다. 작은 ‘시’라는 이름의 글자 정령은 노란 빛을 내뿜으며 날카로운 눈으로 준서를 바라보았고, ‘어’라는 또 다른 글자는 구부러진 가지처럼 조용히 미소 지었다.
“우린 잠든 언어의 수호자들이야,” 파란 빛이 도는 문장 정령이 말했다. “오래전부터 네가 겪는 고통을 알고 있었지. 넌 잊혀진 언어의 아이야,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떠도는 그 아이.”
준서는 얼떨떨한 상태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왜 내 안에 말이 없는 거죠? 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거죠?”
“너의 내면 깊은 곳에서 언어들의 기억이 사라졌기 때문이야.” 시 정령이 살짝 다가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언어는 살아 있어. 말은 단지 소리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삶과 문화, 역사 그 자체야. 각각의 언어에는 고유의 숨결과 기억이 깃들어 있지. 그런데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어떤 말들은 잊혀지며 잠들기 시작했어. 그렇게 잠자는 언어들이 많아지면서 너 같은 아이들의 마음속에서도 그 언어들이 사라진단다.”
준서의 가슴 속에서는 이상한 파동이 일어났다. 겨우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물었다. “그럴 수 있나요? 잃어버린 언어를 다시 찾을 수 있나요?”
“물론이지. 그래서 우리는 여기 있어.” 문장 정령이 빛을 발하며 말했다. “우리 ‘잠자는 언어 보존소’의 사람들—개성 넘치고 특별한 직원들—은 각기 다른 말의 정령들과 함께 세상 곳곳에 흩어진 사라진 언어들을 찾아내고, 다시 깨우고, 사람들에게 돌려준단다. 네가 그 불가능해 보이는 여행에 함께 하길 바란다.”
갑자기 떠오른 한 생각이 준서의 심장을 뛰게 했다. 사라진 언어들을 되찾는다는 것, 잊힌 말들이 살아 숨 쉬는 세상의 비밀을 풀어가는 대모험. 아직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길, 그러나 그 길의 끝에 자신만의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없는데?” 그는 두려움을 가득 담아 말했다.
“그것이 우리 여정의 시작이 될 거야.” 시 정령이 손가락처럼 생긴 작은 촉수를 펴며 부드럽게 말했다. “말은 네가 듣고, 느끼고, 마음으로 부르는 순간부터 다시 자라나기 시작해. 잊힌 언어들을 다시 깨우는 건 단지 소리를 되찾는 게 아니야. 꿈과 기억, 그리고 소통의 마법이 녹아져 있지. 너는 언어와 소통의 다리, 그리고 우리 모험의 첫 걸음이야.”
준서는 깊고 낯선 세계로 한 걸음 들어섰다. 그림자처럼 흩어진 문자와 생명을 지닌 말의 정령들이 그의 눈앞에 춤추었고, 그들과 함께 사라진 언어의 이야기가 빗발처럼 쏟아졌다. 누구도 가본 적 없는 언어의 심층 기억, 감춰진 문명과 다양성, 그리고 상처입은 역사 속의 목소리들.
그 순간, 뭔가가 어둠 속에서 준서의 어깨를 살며시 감쌌다. 그것은 빛보다 미묘한 차원의 생명체였다. “네가 선택받았어,” 속삭였다. “우리 모두가 숨 쉬는 말의 세계에서 네가 깨워 줄 언어가 기다리고 있어. 그 여정에서 네가 어떤 존재가 될지는 아무도 몰라. 하지만 희망은 반드시 찾아온단다.”
준서의 가슴 속에서 말들이 점점 모여들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언어의 정령들과 처음으로 눈맞춤을 나눈 그 순간, 사라진 목소리가 어슴푸레 떠오르는 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거대한 파도처럼 몰려오는 불안과 의문도 함께했다. “말을 잃어버린 아이”에서 “말의 수호자”로 거듭날 그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려 한다.
그때, 아주 멀리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낮고 묵직한 기계음과 더불어, 반짝이는 빛이 어두운 골목 끝을 가르고 있었다. 그것은 오래전 잊힌 언어들이 짓밟히고 파괴되는 신호였다. 준서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었다. 모험은 곧 시작될 것이며, 그의 선택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