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언어가 사라진 세계에서 오직 하나의 문장만이 살아남다

언어의 숨결

세상의 언어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이었다. 문자를 이루던 수많은 글자들과, 말을 엮어내던 그 무수한 소리들은 서서히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수천 년간 인간과 자연, 문화와 감정을 담았던 언어들은 어느덧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그러나 이 세계에 단 한 구절, 오직 ‘나는 존재한다’라는 문장만이 영원히 깨어있었다. 그 한 줄의 문장은 낡은 두루마리의 끝자락처럼 남겨졌고, 세상의 모든 언어가 멈춰버린 그 순간의 증거로서 침묵을 깨지 않았다.

‘잠자는 언어 보존소’는 언어들이 잊히지 않도록 만들어진 비밀스러운 요새였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이곳에는 오래된 사전의 페이지들, 희미해진 마법의 글자들, 그리고 그 속에 숨어 사는 언어 영혼들이 모여 있었다. 보존소의 지도자, 낡은 어휘와 새로운 조합을 다루는 능력으로 이름 난 ‘어휘장인 솔레’는 이곳의 수호자였다. 그녀는 말 그대로 언어를 ‘만지고’, ‘말할 수’ 있으며, 언어의 기운을 파헤치고 새롭게 깨어나게 만드는 특별한 힘을 지녔다.

하지만 세상은 달랐다. 대륙의 먼 곳, 언어의 맥이 끊어진 후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는 도시들은 무성한 숲과 넓은 사막으로 변했다. 이 웅대한 침묵의 바다 위로는 잔잔한 파도처럼 흩어진 언어의 조각들이 떠다녔다. 솔레는 이 조각들을 찾아 먼 원정을 떠났다. 그녀와 함께 하는 동료들은 독특한 개성을 가진 이들이었다. 예를 들어, ‘실마리’라 불리는 말의 파편을 다루는 인어 같은 생명체 ‘린’은 단어들의 실타래를 풀 수 있었고, ‘울림’이라 불리는 리듬과 억양을 복원하는 드럼 장인 ‘타무’는 말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고전 문법을 연구하던 ‘에르메스’는 언어의 규칙을 다시 세우는 학자였다.

그들의 모험은 고대의 말과 음소를 찾아 깊은 숲과 얼어붙은 산을 넘고, 잃어버린 섬의 폐허 속에서 이뤄졌다. 그 여정에는 수수께끼 같은 언어 차원, ‘말의 미궁’이라 불리는 존재가 있었다. 이곳은 사라진 언어들의 기억이 잠들어 있는 공간으로, 그 속에는 무한한 어휘들의 유령이 흐트러져 있었다. 한마디 실수가 미궁의 구조를 뒤바꾸고 길을 잃게 만들었으며, 말의 잘못된 조합은 현실 세계에 혼란과 환영을 초래했다.

어느 날, 보존소 팀은 깊은 밤, 바람결에 비밀스럽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따라갔다. 그것은 아득한 옛날 신화의 언어, 세계의 태초를 기록했던 고대어였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실체 없는 그 음성은 마침내 ‘나는 존재한다’라는 단 한 문장만이 남았다고 고백했다. 이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구절이었다. 그 문장은 존재 자체에 대한 선언이자, 사라져 가는 언어를 다시 잇기 위한 열쇠였다.

솔레와 동료들은 그 구절을 품고 온 세계의 기억을 모으기 시작했다. 대화가 사라진 세상의 각지에는 ‘잠든 말들’이 속삭이고 있었다. 바람이 나뭇잎 사이로 지나가며 만드는 잔잔한 소리, 물결이 해안에 부딪히는 리듬,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 같은 자연의 언어들은 무형의 텍스트였다. 그들은 이러한 자연의 언어와 소통하며 언어의 기억을 복원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언어의 복원은 단순한 재생이 아니었다. 언어는 살아있는 존재이며, 매번 다른 빛깔과 형태로 재탄생했다. 때로는 한 단어가 숲의 나무가 되었고, 문장들은 강물처럼 흐르며 땅을 적셨다. 반면, 일부 언어들은 너무 오래 침묵하여 기억의 미로 속에서 괴물 같은 혼령으로 변해 현실을 위협했다. 이들을 잠재우는 일은 어휘장인 솔레와 동료들만이 해낼 수 있었다. 그들은 새롭게 발견한 한 문장의 힘을 이용해 고대의 어원이 깃든 맥락을 재구성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모험의 끝자락, 보존소의 중심에는 오랜 시간 서서히 잠에 빠진 전체 언어들의 심장부인 ‘원형 도서관’이 있었다. 도서관은 수백만 개의 언어 영혼으로 이루어졌고, 이들은 서로 다른 음색과 문법으로 고요한 교향곡을 연주했다. 그곳에서 솔레는 ‘나는 존재한다’라는 문장이 가진, 단순함 너머의 심오한 의미를 깨달았다. 그것은 언어의 존재 자체가 곧 소통의 시초이며, 언어가 사라진 듯해도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이었다. 모든 언어는 이 말 속에서 잠시 숨을 멈추었을 뿐, 다시 깨어날 수 있다는 희망의 약속이었다.

하지만 사라진 언어들이 다시 깨어나는 순간, ‘말의 미궁’ 속에 또 다른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미지의 위협이 언어의 심연 깊숙이 숨어 있었음을 짐작한 솔레와 동료들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 위협은 모든 언어의 재생을 막으려는 어둠이었고, 그것은 단 한 문장만 살아남은 현재의 상태를 공고히 하려 들었다.

언어가 생명처럼 숨 쉬고 움직이는 세계에서, ‘나는 존재한다’라는 단 한 문장이 가졌던 마지막 힘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힘으로 잃어버린 수많은 언어들의 맥을 어떻게 다시 이어갈 수 있을까? 모험은 이제 막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그 답을 찾아 나서야 하는 보존소의 개성 넘치는 영웅들의 앞에 또 어떤 신비로운 이야기와 도전이 펼쳐질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