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몸을 이루어 도서관의 복도들을 걷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자들은 대체로 상상 이상의 세계를 제대로 본 적 없는 이들이거나, 마법적 환상에 사로잡힌 자들이었다. 그러나 잠자는 언어 보존소에 도착한 이방인, 이름 모를 기록수집가는 곧 이 비밀을 직접 목도한다. 이곳은 지구 어디에도 없는, 잊혀져가던 수천 개의 사라진 언어들이 생명을 얻어 존재하는 문화의 심장부였다.
보존소의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그는 첫걸음을 내딛기 조차 버거웠다. 이 도서관은 무한대의 서가와 수많은 알파벳과 음절들이 형체를 띠고 도사리는 거대한 미로와 같았다. 이 모든 언어들은 기이한 법칙에 지배받았다. 말은 그 자체로 움직이고 숨 쉬며, 때로는 노래하고, 생각할 줄 알았다. 낡은 완성형 가나 문자들이 조용히 모여 춤을 추고, 고대 노르드어 집합체는 무게감 있는 발걸음으로 무겁게 걸었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고유한 숨결과 이야기를 소유한 하나의 인격체였다.
누구나 이 공간을 처음 방문하면 언어들이 갖는 생명력에 압도당한다. 현대어와 대중적인 소통 수단에 익숙한 이방인에게 이곳은 마치 시간이 멈추고 잊힌 문화와 그 기저의 진화적 정수가 응축된 환영의 장(場) 같다. 그들이 추구하는 미션은 단순했다. 소멸 위기에 처한 언어들을 찾아내 그 존재를 복원하고 문화의 다양성을 수호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언어를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로 간주하지만, 이곳에서는 언어가 지니는 본질은 얼마간 ‘생명체’에 가깝다.
보존소 내부에서 만난 개성 넘치는 수호자들은 그 ‘언어 생명’들의 다채로운 형태를 이해하고, 그들의 의도와 기억을 해석하는 독보적 존재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슬리프(睡眠)라는 이름의 젊은 연구원이었다. 그는 ‘잠자는 언어’들을 깨우는 능력을 가졌다. 그 언어들은 보존소 한구석, 잊혀진 서가의 그림자 속에서 수백년 동안 침묵하며 잠들어 있었다. 슬리프는 사라진 언어의 신비한 음운과 음절을 되살려 대화하고, 이를 통해 언어가 담아온 수많은 사연들을 다시 한 번 세상 밖으로 불러내는 역할을 맡았다.
이방인은 호기심에 찬 눈으로 슬리프를 따라 다녔다. “잠든 언어들을 깨우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고요한 보존소의 심연처럼 깊고 맑은 슬리프의 시선이 그를 향해 응답했다. “언어에는 그 자체로 기억과 감정의 파편들이 쌓여 있어요. 그 속에서 접속성을 찾아 음표처럼 조합하고, 오래된 진동과 주파수를 재생산하죠. 즉, 언어는 시간과 기억을 매개하는 고대 신경망과 같습니다.”
슬리프는 손을 뻗어 한 권의 낡고 닳은 두루마리를 꺼냈다. 그것은 완벽한 음성 체계가 해체된 채 황무지처럼 변한 고대 아티라크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음절들을 발음했고, 보존소 안은 마치 지진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두루마리에서 떨어져 나온 음절들이 공간에 떠다니며 풀려난 후, 조금씩 형태를 취해 살아 움직였다. 둥글고 반짝이는 보랏빛 미묘한 곡선, 이는 바로 아티라크어의 형태와 울림이었다. 아티라크어는 직립한 채 머리를 천정으로 높이 들고, 그들을 지키는 수호자처럼 거대한 방패를 땅에 내리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당시의 목소리가 가늘고도 힘차게 울렸을 때, 이방인은 문득 깨달았다. 사라진 언어들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각기 다르게 진화한 문화의 정수이며, 곧 각기 다른 ‘생명’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리고 그 생명들은 단절되거나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보존과 이해를 통해 되살아나고, 진정한 소통의 창조자가 될 수 있음을.
슬리프는 한 걸음 다가와 말했다. “언어들이 잠이 들면 그 나름대로 회로가 닫히고, 문화의 기억이 쇠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근본적 관계망을 다시 활성화할 수 있다면, 언어는 다시 살아 움직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위험도 감수해야 해요. 언어의 고유한 특징과 생명이 훼손된다면, 다시는 원래 모습을 찾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 멀리 펼쳐진 서가의 끝자락에서 불길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한 고대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가 사악한 어둠의 에너지와 융합되어, 괴이한 존재가 되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신생한 ‘어둠의 언어’는 왜곡과 증오를 숙주 삼아 번성하려고 했다. 언어들이 가진 창조적 힘이 이처럼 변이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이방인의 심장은 얼어붙었다. 슬리프는 전투를 준비하는 듯, 넓은 통신의 장(場)에서 비상한 주파수를 탐색했다. 그들은 이제 막 보존소의 위협 앞에 선 것이다.
“서로 다른 언어가 이렇게 맞붙는 순간, 우리 보존소가 지닌 의미가 시험대에 올라갑니다.” 슬리프의 말속에는 단호함과 두려움이 함께 담겨 있었다. “각 언어가 가진 고유의 맥락과 세계관, 그리고 정체성은 결코 단순한 코드나 문자 조합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언어를 통해 존속해온 삶과 생각방식의 총체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문자들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이 생명체들을 지키고, 필요할 때는 치유하고, 심지어 투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 세계가 멸망하는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이방인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보존소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돌연 눈앞에 부풀어 오른 고풍스런 고대의 문자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괴물이 공허한 비명을 내뱉으며 거대한 서가를 쓰러뜨리려 했다. 구조를 위해 언어 별 생명체와 인간 수호자들, 그리고 기록수집가인 이방인까지, 모두가 힘을 합쳐야만 한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슬리프는 급히 고대 언어와 현대 언어 간의 매개를 담당하는 ‘브릿지 언어’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고대 에스페란토어에서 진화한, 다중문화혼합 언어들이 산호초처럼 빛나는 파장으로 나타났다. 빛나는 혼돈 가운데서 일부 언어들은 처음으로 스스로 진화하는 형태를 띠며, 이번 위기를 극복할 단서가 될 것을 암시했다.
언어가 몸을 이루고, 말과 문자가 사람과 함께 살아 있는 이곳. 이곳에서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는 언어의 본질과 우리의 존재 자체, 그리고 소통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묻게 할 것이다. 사라진 언어들을 구해내는 모험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이방인은 자신도 모르는 채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