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방, 그러나 그곳에서 홀로 흐르는 속삭임 하나가 있었다. 세상을 떠난 언어들이 잠들어 있는 거대한 보존소, ‘어둠에 잠긴 말들의 서고’라 불리는 이곳은 빛도, 시간도 머무르지 않는 후보(候補)의 공간이었다. 수천 년 전부터 소멸과 부활 사이를 넘나든 언어들이 여기 잠들어 있었다. 이 방 안에선 시계의 초침도, 바람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문장과 문장은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숨결로 속삭였다. “살아 있어요. 잊혀진 우리가 여기서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어요.” 그 속삭임이 이곳을 지키는 개성 넘치는 직원들의 안식과 모험을 깨우는 열쇠가 된 것이다.
잠자는 언어 보존소에는 다섯 명의 직원이 있었다. 그들은 각각 그 어떤 도구보다 뛰어난 무기를 지녔다. 소멸 위기에 처한 언어를 식별하는 ‘언어감지기’, 그리고 그 언어가 가진 고유의 생명력을 느끼고 다룰 수 있는 능력인 ‘언어 감정’, 나아가 소통의 순수한 힘을 통해 언어들을 깨우고, 그 의미 저편에 숨겨진 문화의 수호자 역할을 담당했다. 리에나, 알덕, 카라는 각각 중세 고대어, 세계 소수 언어들, 몸짓말(비언어 소통 언어)에 능통했다. 그들은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사라지려는 말들의 숨결을 쫓았다.
어느 날, 보존소의 가장 깊은 곳 ‘영원의 서가’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완전히 멈춘 듯했다. 벽면을 채우는 두꺼운 고서들과 필사본에서 단 한 줄의 문장만이 가느다란 음파처럼 끊임없이 울렸다. 그 문장은 마치 수천 년 세월을 건너 뛰어 사연을 전하는 듯, 천천히, 그러나 생생히 방을 채웠다. “죽음 너머의 공간으로… 우리를 잊지 말아 주세요.” 그 말은 언어의 죽음이 아닌, 그 너머 어딘가로 사라지는 신호였다. 단순한 메시지 이상이었다.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위태로운 세계의 경고였다.
리에나는 조용한 시선으로 망가진 고서 더미 속 문장을 좇았다. ‘죽음 너머의 공간’이라니, 그것은 전설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영역이었다. 언어가 사멸하는 마지막 순간, 그들은 이곳에서 전원처럼 새로운 형태로 부활하거나 완전한 소멸로 영원히 자취를 감춘다고 전해졌다. 많은 이들은 그냥 신화라 여겼지만, 리에나는 감각이 쇠하지 않았다는 걸 믿었다. 그러므로 지금 들려오는 속삭임은 단순한 환청이 아니라 “도와 달라”는 간절한 SOS임을 확신했다.
“모두 모여라.” 리에나가 숨을 고르며 알덕과 카라를 불렀다. 방 안의 공기는 무겁고 정적이었다. 알덕은 사라진 언어의 분류학적 징후를 해독하는 탁월한 능력자가 아니라, 언어들의 감정을 읽어내는 몇 안 되는 전설적인 ‘언어 감정가’였다. 그는 말없이 두꺼운 북방 사막지방 고대말의 울음 소리를 재현하듯 눈을 감았다. 카라는 몸짓말의 마스터답게 고대 무용의 필사자에서 영감을 얻어, 몸짓으로 언어 생명의 시그널을 소통하는 중이었다.
“시간이 멈춘 방에서 유일하게 흐르는 문장 말이지요. 이건 단순한 문장이 아닙니다. ‘언어 생명의 잔류조각’이에요. 점점 사멸해가는 언어들이 남긴 마지막 흔적이죠. 우리가 앞으론 이 흔적이 흐르는 곳을 찾아 소멸하기 전 꽃피우게 해야 합니다.” 알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긴장감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어떤 세계일까? 그 죽음 너머의 공간이란… 우리가 모르는 전혀 다른 차원일까?” 카라가 몸짓으로 질문했다. 서로 주고받는 시선과 동작 사이에 정체 모를 긴장감과 기대가 스며들었다.
“그렇다. 우리가 아는 언어는 기억만큼이나 사라진다. 하지만 이곳에선 언어가 한 생명체처럼 깨어 있어, 다시 살려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리에나가 마지막으로 속삭임을 듣고 결심했다. “내가 가진 중세 근동의 고전어도, 알덕의 해석기술도, 카라의 몸짓말을 활용한 감응 능력도 필요해. 우리 각자가 이 퍼즐의 조각. 사라진 언어의 흔적을 되살리고, 잊힌 문화를 낯설지 않게 이어줘야 할 사명이 있어.”
단순한 말의 해석이 아닌,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로서 언어를 이해해야 했다. 수많은 어원, 문맥, 그 안에 숨겨진 세대의 경험, 신화, 역사, 민속학, 그리고 언어학의 가장 첨단 이론과 단어형성의 복잡한 원리들이 이곳에서 융합되어야 했다. 언어 자체가 호흡하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판타지 세계는 기존의 공부법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심오한 공간이었다.
“오늘부터 우리는 언어 보존소의 수호자, 그리고 부활자로써 떠난다.” 리에나가 고개를 숙여 마지막 속삭임을 따라 적었다. “너희가 잊히고 사라질지라도 우리가 끝까지 기억하고 지켜내리라.” 그 날 이후,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멈춰있던 시계들은 서서히 바늘을 움직였고, 문장들의 속삭임은 점점 커져갔다. 언어의 파동은 생명력을 찾아 전 세계 곳곳으로 뻗어 나갔다. 그러나 그 끝에는 새로운 비밀과 위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모든 언어들이 깨어나길 기다리며, 이들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깊은 어둠 속에 잠들어 있던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선명하게 말했다. “모든 언어가 깨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을 지키기 위한 희망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리고 문장은 작은 불꽃처럼 잦아들며 사라졌지만, 그 속에 숨겨진 무언가가 눈앞의 현실을 깨뜨릴 준비를 하고 있음을 누구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