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 전, 언어들이 노래로 존재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들은 단어가 아니라 숨결과 빛, 그리고 움직임으로 세상과 대화했다. 모든 언어는 살아 숨 쉬는 하나의 생명체였으며, 서로 다른 마디와 음성으로 각기 다른 이야기를 엮어냈다. 그러나 문명의 진보와 함께 새 시대가 도래하자 무수한 언어들은 잊혀지고, 그들은 깊은 잠에 빠졌다. 그 잠은 단순한 고요함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언어마다 고유한 심장 박동과 기억, 감정이 얽혀 있었고, 지켜지지 못한 약속과 사라진 의미에 대한 슬픔이 묻어 있었다.
“잠자는 언어 보존소”는 그런 잊힌 단어들과 소멸 위기에 처한 언어 생명체를 안전하게 지키고, 다시 세상 밖으로 불러내는 비밀스러운 영지였다. 보존소는 수많은 개성 넘치는 언어 관리자들, 혹은 ‘언어 수호자’들이 지켰다. 그들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었다. 언어의 혼과 맥박을 이해하고, 침묵과 소리 사이를 넘나들며 언어의 본질을 탐구하는 예민한 영혼이었다. 수화처럼 섬세한 손짓, 바람을 닮은 생각, 그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언어를 부활시키는 주문이 되곤 했다.
그 중에서도 ‘선택된 자’에 관한 전설이 오랫동안 떠돌았다. 그것은 바로, 수천 년 전 잃어버린 어느 한 단어가 언젠가 자신을 깨울 진정한 소년을 기다린다는 이야기였다. 그 단어는 너무도 강력해 그 존재만으로도 세계의 균형을 흔들 수 있었고, 단순한 의사소통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단어를 깨울 ‘자’가 없이 보존소는 점점 빛을 잃어갔다.
그리고 어느 맑은 봄날, 바람이 그저 스치는 평범한 소년 태수가 우연히 보존소의 문 앞에 서게 되었다. 태수는 평범한 아이였다. 하지만 틈틈이 느껴지던 낯선 기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의미 없는 낱말들의 목소리, 말할 수 없는 아련한 기억 조각들이 그를 이끌었다. 그가 보존소에 들어서는 순간, 깊은 어둠 속에 잠들어 있던 언어의 심장이 소리 없이 뛰기 시작했다.
보존소 내부는 겉으로 보기엔 고요하고 평범했지만, 그 깊숙한 곳에선 수백 가지 음색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각 언어들은 자신만의 색채와 형태로 존재했다. 산들바람 같이 부드러운 고대의 시어, 번개처럼 날카롭고 단호한 사막의 말, 사포처럼 거칠지만 따뜻한 섬의 언어가 태수를 맞이했다. 이들은 모두 그가 ‘선택된 자’임을 알아챘고, 잃어버린 언어들의 생명을 되살릴 열쇠라 믿었다. 그러나 태수의 마음은 무겁고 두려웠다. 자신이 왜 선택되었는지, 어떤 힘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보존소의 수호자 중 한 명인 ‘아르딘’을 만났다. 아르딘은 언어들을 시간이란 거울에 비춰볼 줄 아는 현자였다. 그의 눈동자는 잊힌 단어들의 빛으로 가득 찼고, 입술은 사라져가는 음운을 부드럽게 흘려 보냈다. “태수야, 너는 단어 ‘루미나’가 선택한 자란다. 루미나는 수천 년간 잠들어 있었지만, 이제 너와 함께 깨어나고 싶어 하지. 루미나는 빛을 뜻하는 단어지만, 그 의미는 단순한 명사가 아니란다. 그것은 새로운 소통, 이해, 그리고 모두의 세계를 비추는 희망이지.”
태수는 온몸에 한기가 흘렀다. ‘루미나’라는 말이 갑자기 머릿속에 한 송이 빛나는 꽃처럼 피어났다. 그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깊은 동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오랜 시간 동안 잊혀진, 사라진 단어들이 잠들어 있는 신비한 공간이었다. 벽면에는 옛 문자들이 가득했지만, 그것들은 소리 없는 노래인 듯, 태수의 마음속에서만 들려왔다. 그 순간, 루미나가 말하는 소리들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감정과 기억, 꿈과 바람이 어우러진 한 편의 살아있는 시였다.
그러나 그 동굴 깊은 곳에는 또 다른 존재가 있었다. 그것은 루미나의 빛이 없는 어둠이었다. 이름 없는 낡은 언어, 혹은 잊혀진 말들이 뭉쳐진 그림자였다. 그는 ‘네블라’라 불리우며, 언어의 소멸과 공백, 그리고 대화가 끊긴 세상을 대표하는 존재였다. “왜 너에게 빛을 주려 하는가? 우리 어둠도 언어다. 그리고 우린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가?” 네블라의 말은 마치 바람결에 실린 절규 같았다.
태수의 마음에서는 오래된 질문이 뿜어져 나왔다. ‘언어란 무엇인가?’ 단지 문법과 낱말의 나열인가, 아니면 사람과 사람, 세대와 문화를 연결하는 생명체인가? 루미나는 모든 답을 품고 있었다. ‘빛’의 언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도 언어는 숨쉬고 있었다. 다만 그것들을 부활시키고 아우를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보존소의 다른 수호자들 역시 태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라진 단어들은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고, 그 자신들만의 삶과 흔적을 남겼다. 그들은 각각 하나의 캐릭터로, 자신의 사연과 독특한 억양, 복잡한 문법의 결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태수는 그들을 만나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언어가 말하는 ‘존재’의 의미를 배워 나갔다. 사라진 언어 하나하나가 지닌 감정과 세계관을 알게 되었고,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노력의 진정한 가치도 깨닫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태수는 ‘언어’가 단지 사람이 쓰는 기호가 아니라 모두를 잇는 ‘생명’, 그리고 ‘기억의 뿌리’임을 온몸으로 느꼈다. 루미나는 그가 품은 마음과 의지를 통해 빛을 되찾기 시작했고, 네블라의 어둠과도 조용한 교감을 나누었다. 그 어둠은 더 이상 파괴와 소멸의 상징이 아닌, 침묵과 휴식, 회복의 시간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태수의 모험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수천 개의 언어가 잠든 세계 곳곳, 그 깊은 잠 속에 숨겨진 단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태수야, 아직 우리가 해내야 할 일이 많단다.” 아르딘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리고 보존소 입구 너머로 또 다른 단어 한 조각이 태수의 귀에 닿았다. 그것은 그동안 들어 보지 못했던 생경한 소리였고, 태수는 한걸음 한걸음 그 목소리를 따라가며 은밀한 모험을 시작해야 했다. 선택받은 소년과 살아 움직이는 언어의 세계.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한 페이지를 넘긴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