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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속에서 잠든 단어들이 깨어나던 어느 봄날의 아침

잠자는 언어 보존소의 새벽

바람이 솔솔 불던 어느 봄날의 아침, 잠이 고요히 깔린 ‘잠자는 언어 보존소’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건물 안은 수백 년간 침묵에 잠겨 있던 사어(死語)들이 깨어나는 듯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따스한 햇살이 커다란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신비로운 공간 곳곳에 단어들의 숨결을 비추었다. 언어가 살아 숨 쉬는 이 공간은 마치 고대의 미술관과도 같았지만, 예술품 대신 수천 개가 넘는 문장과 낱말들이 서랍과 선반, 투명한 박스 안에 진열되어 있었다. 그 무엇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감춰진 언어의 잠자리가 새벽을 타고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개성 넘치는 직원들’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있었다. 이들은 단순한 언어학자가 아니라, 언어 그 자체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능력을 지닌 특수한 수호자였다.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의 파편들이 어떻게든 살아남게 하기 위해, 잠자는 언어들을 관찰하고 연구하며, 때로는 모험을 떠나는 임무를 맡았다. 그중에서도 세 명의 대표적인 직원, ‘에티’, ‘말리크’, 그리고 ‘세리아’가 있었다. 이들은 각자의 특성과 재능으로 사라진 언어를 찾아내고, 그 언어가 그들만의 생명을 되찾도록 돕는 데에 힘을 쏟고 있었다.

에티는 언어의 심층 구조를 보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음절의 고유한 리듬, 그 속에 함축된 의미와 감정을 직감하듯 파악했다. 마치 음악을 듣듯 단어들이 합주하는 소리를 듣는 것만 같다. 말리크는 더욱 희귀한 능력자였다. 그는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남긴 기억과 감정을 ‘냄새’처럼 따라갈 수 있었는데, 사멸의 위험에 처한 언어들을 찾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세리아는 젊지만 가장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 그녀는 언어들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형상, 즉 단어들이 가지는 자화상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언어가 가진 문화와 역사, 그리고 정체성의 시각적 환영과도 같았다. 세 명은 합심하여 언어들을 깨우고, 그들이 속한 문화와 역사를 다시 세상에 되살려 내고자 하였다.

그날 아침, 특별한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했다. 수백 년 전 사라졌던 ‘칼리씨어’라는 언어의 첫 음절들이 조용히 떨리더니, 마침내 마른 종이처럼 바스락거리며 깨어났다. 칼리씨어는 태평양 섬들에서 전해 내려오던 고대 언어인데, 근대화와 전쟁의 상처로 인류 역사의 안갯속으로 사라졌던 말이었다. 에티는 이 소리를 듣고 숨을 멈췄다. ‘아직 살아 있다’는 감각이 몸을 관통했고, 그녀는 즉시 칼리씨어 전용 보존실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는 이미 말리크와 세리아가 대기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서로의 눈빛에서 ‘이번이 관건’임을 깨달았다.

보존실 안에는 수십 개의 구슬 같은 언어 에너지체들이 둥둥 떠 있었다. 각 구슬 속에는 언어가 가진 정체성과 기억의 조각들이 빛나고 있었는데, 칼리씨어 구슬은 특히 강렬했다. 그러나 빛이 흐려지고 사라질 듯한 위태로운 상태였다. 세리아가 구슬에 손을 대자, 미묘한 빛줄기가 뻗어 나와 방 안을 은은하게 물들였다. 그녀는 칼리씨어 단어들의 화려한 자태와 고대 신화, 생활 풍습, 그리고 전사들의 노래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각각의 낱말은 단순한 문자에 머무르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 숨 쉬고 있었다.

“이 구슬이 사라지면, 칼리씨어가 완전히 영영 잊혀질 거야. 그건 우리의 문화적 유산이자,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이 무너지는 거라고.” 에티가 말했다. 말리크는 이미 칼리씨어를 쓰던 마지막 부족에서 흘러나온 잔향 냄새를 쫓아 이곳까지 왔다. “도움이 필요해. 이 언어를 다시 세상에 활짝 피우려면, 그 언어를 쓰던 사람들의 뿌리를 찾아야 하거든.”

언어를 품은 구슬이 점점 흔들리면서 서서히 빛을 잃을 때, 세 사람은 곧바로 모험을 준비했다. 그들이 떠나야 할 곳은 바다 반대쪽, 칼리씨어 끝자락 깊숙한 정글 속 폐허였다. 그곳에는 마지막으로 이 언어가 맥을 이어가던 수호자들이 남긴 유적과 이야기가 잠들어 있었다. 세 명의 언어 수호자들은 각자의 특기를 살려 잠든 언어의 숨결을 좇는 길에 올랐다. 그들이 가야 할 곳은 단순한 ‘발견’이 아니라, 세계의 다양성과 풍요로운 문화의 씨앗을 되찾는 신성한 여정이었다.

언어가 생명처럼 움직이는 세상에서 단어는 단지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 속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담은 영혼이었으며, 문화가 엮인 복잡한 그물망이었다. 이 보존소의 직원들 역시 언어를 그저 ‘기호’로 보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정체성 그 자체로 이해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라진 언어를 되살리는 의미는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잊혀진 세계의 문을 다시 여는 것이었다.

그 아침, 밖에서는 봄바람이 벚꽃잎과 함께 춤을 추었고, 보존소 안에서는 도시락처럼 단어들이 서서히 눈을 떴다. 낯설고 희미해진 어휘들은 작은 빛을 내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시 전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창 밖으로 한 마리 하얀 새가 날아와 보존소 기둥에 앉았다. 그것은 오래전 전설 속에서 ‘언어의 전령’이라 불리던 상징적인 존재였다. 새는 이 세 명의 수호자들에게 긴 여정을 예고하는 듯 깊고 울림 있는 울음을 토해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해. 진짜 여정은 앞으로야.” 세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에티와 말리크는 빛나는 구슬을 단단히 붙잡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 속에선 단어들이 품은 생명의 무게와 동시에, 그것들을 지켜내야 한다는 묵직한 사명이 서려 있었다.

바깥 하늘은 푸르게 빛났고, 고요하던 잠자는 언어 보존소는 서서히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매 초마다 깨어난 언어들은 새로운 세상으로 날개를 펴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이 세계 어딘가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 사람은 소중한 희망을 느꼈다. 하지만 누군가 이 소중한 언어들을 노리고 있다는 암운도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알지 못했다—이번 모험이 단지 언어의 부활이 아니라, 세계의 균형을 뒤흔들 결정적인 분기점이 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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