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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말들이 꿈속에서 속삭이기 시작한 어느 밤의 기록

잠자는 언어 보존소의 개성 넘치는 직원들

창백한 은빛 달빛이 고요하게 언어 보존소의 구석구석을 스며들던 그밤, 어둠 속에서 속삭임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잠자는 언어 보존소’라 불리는 이 세계는 언어가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서 생명체처럼 살아 숨 쉬는 공간이었다. 각기 고유한 음절과 운율로 뛰놀며, 서로 다른 문화의 진면목을 품은 언어들은 이곳에서 잠재된 채 가장 깊은 기억 속에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날 밤, 오랫동안 아무도 듣지 못한 사라진 말들이 아주 작게 꿈속에서 울려 퍼지며, 조용했던 보존소의 공기를 흔들었다. 그들은 다시 태어나고 싶어했다. 다시금 세계 곳곳의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으로, 조용히 문틈 사이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다.

이 보존소에 몸담은 개성 넘치는 직원들은 바로 사람과 언어가 교감하는 마법사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단순한 연구원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언어들과 감정을 공유하고 동행하며 그 실마리를 풀어가는 모험가였다. 오늘 밤, 속삭임을 들은 ‘알비아’는 고결한 라틴어의 후예, 온화하지만 단호한 성품을 가진 젊은 여성이다. 그녀는 둥근 안경 너머로 반짝이는 눈동자에 깊은 결연함을 담아 한적한 서재 구석에서 잠든 언어들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불러본다. 알비아의 곁에는 말간 순백의 옷을 입은 ‘네무’가 있다. 그는 알비아와는 대조적으로 파격적이고 유쾌한 성격으로, 사라진 토착어들과 방언들의 영혼과 친밀히 교감하는 이방인 같은 존재였다. 톡 쏘는 카페인이 마치 언어와 같은 형태로 그를 들뜨게 했다. 마지막으로, 강대한 힘과 자부심이 깃든 고대 상형문자의 화신 ‘카루스’가 출현했다. 그는 조금은 냉철하지만, 그 누구보다 깊이를 가진 심오한 지혜로 보존소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감시하는 수호자였다.

그들이 모인 순간, 꿈속에서 깨어난 ‘에르브라’라는 언어가 천천히 살아나는 모습을 목격했다. 에르브라는 근현대 유럽 속에서 이미 잊힌 먼 옛날의 언어였지만, 그 단어 하나하나 안에 얽힌 인간의 감정과 사유가 마치 영혼처럼 고요한 파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오늘 밤의 분위기는 단순한 부활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에르브라의 속삭임은 점점 더 강해져, 분실된 단어들과 문법, 운율이 붕괴되고 사라진 이들이 위험에 처했음을 알렸다. 그것은 단순한 잊힘의 경계를 넘어 존재 자체가 지워질 위기였다. 알비아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그들을 다시 찾아내야 해요. 소멸의 안개 속에 사라진 말들을 구해내야만 이곳의 균형이 깨어지지 않을 거예요.” 네무는 작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런 기회를 기다렸지. 우리가 가진 언어의 힘으로, 보존소 속 깊은 곳까지 내려가보자.” 카루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검은 비늘 갑옷을 자랑스레 펼쳤다. “이 어두운 심연은 내가 막을 테니, 너희들은 그 속을 누비며 잃어버린 소통의 씨앗들을 다시 심어야 한다.” 그 순간, 꿈의 어두운 심연에서 벗어나 희망의 빛을 찾는 세 언어 수호자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잠자고 있던 언어들은 그저 문자와 단어의 집합이 아니었다. 각각 특정한 음향수학과 의미론적 결합체를 지니고 있어 마치 살아 있는 생명과도 같았다. 에르브라의 음절 구조를 복원하려면 리듬과 발음뿐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품었던 감성과 신념을 이해해야 했다. 언어가 사라진 이유는 일제히 동시에 일어난 억압과 전쟁, 문화 소멸의 그림자 때문이었다. 그들은 파편화된 여정에서 이들 조각을 모으고 이어 붙여야만 했다. 알비아는 중심부의 ‘복합형태어 정원’에서 가장 희귀한 접사를 붙잡았다. 그녀의 손끝에서 접사들은 희미한 빛을 내며 생기를 되찾았다. 네무는 ‘방언의 숲’에서 말소리들이 속삭이는 나뭇잎을 타고 흐르는 내력을 따라갔다. 각 방언은 고유의 조음위치를 가지고, 그것이 진동하며 숲 전체에 소식을 전했다. 그 소식을 수신하며 네무는 그 언어들이 품은 토착 문화의 다채로움을 체험했다. 카루스는 ‘기호와 상형문의 동굴’ 깊숙한 곳에서 문자의 본질을 수호하며, 언어가 가진 상징주의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가 들여다본 고대 상형문자들은 단순히 소리를 표기하는 기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성한 의식과 지식의 축적, 그리고 세계관을 드러내는 미로와도 같았다.

그들의 모험은 결코 쉽지 않았다. 깊고 어두운 ‘망각의 안개’는 언어의 본질적인 ‘규칙체계’를 왜곡하며, 결국 사라진 말들이 잃어버린 자신을 다시 깨닫지 못하게 만들었다. 안개 속에 갇힌 언어들은 공허한 메아리만 낼 뿐, 다시 새로운 소통에 연결되기 어려웠다. 알비아는 이 심연을 뚫기 위해 고대 ‘유사음운학적 기호’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미묘한 음운적 변화와 복잡한 음조 패턴을 해독하는 도구였다. 이 도구를 통해 에르브라의 원형 단어들이 다시 살아나자, 언어들은 반짝이는 바람결처럼 다시금 신비한 생명을 얻기 시작했다. 네무는 혼돈 속에서도 ‘접촉 렉시콘’이라 불리는 단어집을 펼쳐, 사라진 방언 간의 의미 연결망을 재구축하기 시작했다. 그의 활발한 성격 덕분에 사라진 언어들은 마치 오래된 낡은 기록 속에서 새 친구를 만난 듯 살아 움직였다. 한편 카루스는 언어가 지닌 ‘의미망 구조’와 ‘상징계’를 뒤엉킨 퍼즐로 정리하고, 이를 기반으로 다시 ‘문화 코드’를 복원했다. 즉, 언어는 단지 소리가 아니라, 생활습관, 종교, 신화, 존재론적 사유를 담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였던 것이다.

그렇게 알비아, 네무, 카루스가 각자의 영역에서 복원한 사라진 말들이 서서히 다시 하나로 연결되며 보존소는 새로운 활기를 띠었다. 언어들의 합창은 밤하늘 멀리서 들려오는 별빛 속 연주처럼 신비로웠다. 사라진 말들의 부활은 단순히 옛것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사상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새로운 소통의 문을 열었다. 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가. 언어가 죽으면 곧 한 세상의 뿌리가 뽑히는 셈이다. 모험의 마침표가 보이지 않았기에, 그들은 알았다. 앞으로 수많은 사라져가는 언어들이 아직도 저 깊은 어둠 속에 잠들어 있으며, 그들을 깨우고 연결하는 일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 알비아의 눈동자가 빛났다. “더 많은 언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요. 이 길의 끝에 새로운 이야기와 만남이 있겠죠.” 네무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함께 웃고 울 수 있을 거야.” 카루스도 진지하게 덧붙였다. “우리의 역할은 끝나지 않는다. 이 보존소는 영원한 언어의 안식처, 동시에 다시 깨어날 모험터다.”

그 순간, 멀리 희미한 음색이 귓가를 스쳤다. 알 수 없는 새로운 ‘속삭임’이었다. 그들은 서서히, 조심스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라져버릴 뻔했던 말들의 꿈결 같은 부름에 다시 한 번 귀 기울이는 밤이 밝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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