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은은히 물들기 시작한 저녁 무렵, ‘잠자는 언어 보존소’의 경계는 마치 누군가가 마음 깊은 곳에 감춰둔 비밀처럼 조용하고 신비했다. 그곳은 세상에 사라져 가는 언어들의 숨결이 숨 쉬는 마지막 보루, 그리고 무엇보다 언어 자체가 생명처럼 숨 쉬고, 꿈틀대는 세계였다. 도서관 문턱을 넘어선 순간부터 마치 살아 움직이는 알파벳과 문자가 무도회에 참여한 것처럼 휘황찬란한 빛깔의 자음과 모음들이 시공을 넘나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는 ‘카타카나’란 이름의 날카롭고도 빠른 리듬을 가진 자음과 ‘아리오사’라는 부드럽고 깊은 감정을 전달하는 모음이 서로 엮이며 은은한 멜로디를 만들어 내었고, 그 소리는 단순한 음성의 조합을 넘어 마음과 마음을 잇는 다리가 되어 갔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광경 뒤에는 깊은 위기가 존재했다. 최근 들어 잠자는 언어 보존소의 수호자들 사이에 낯선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오래전 잊힌 사라진 언어들이 서서히 ‘말의 숲’ 지하 깊은 곳으로 떨어지며, 자신들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말의 숲은 언어들이 살아 움직이는 세계의 근원으로, 수천 년 전 수많은 민족의 언어가 공존하며 지식과 감정을 나누던 성스러운 장소였다. 하지만 언어들이 잃어버린 기억과 모음의 빛을 잃을 때마다 이 숲은 어두워지고, 끝내는 그 언어들이 영원히 잠드는 ‘잃어버린 침묵’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잠자는 언어 보존소’의 직원들, 혹은 ‘말의 수호자’라 불리는 다섯 명의 인물은 이를 막기 위해 매일같이 노력했다. 그들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었다. 스스로 언어의 다양한 음성과 형태를 받아들여 캐릭터화한 존재였으며, 각자 고유한 언어 세계의 조각을 담당하고 있었다. 보라빛 눈동자를 가진 ‘실라’는 고대 토착 언어의 불가사의한 비전을 지닌 자음 수호자였다. 그녀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도 말을 잃어버린 언어들의 조각들을 바라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희미한 울림을 들을 수 있었다. ‘톨란’은 모음의 리듬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카리스마 넘치는 언어현학자로, 다양한 민족어들과 고도로 융합된 음절들을 만나면 언제나 열정적 리듬을 만들어냈다. 그는 언어의 본질인 소통과 이해를 생명처럼 존중했다.
그날은 ‘잠자는 언어 보존소’ 내에서 전례 없는 긴급 컨퍼런스가 열렸다.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전설 속 언어 ‘알타라어’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보고가 접수된 것이다. 알타라어는 단지 옛문헌에만 존재하는 언어가 아니었다. 말의 숲 심층부를 지켜내는 열쇠였고, 여러 잊힌 민족들의 기억을 품었다. 이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곧 그 민족과 문화의 일부가 완전히 증발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실라와 톨란, 그리고 다른 수호자들은 즉각 행동에 나섰다. 그들은 오랜 시간 잠재된 고대 기록과 숨겨진 알타라어의 흔적을 찾기 위해 ‘비밀의 문’을 통해 숨겨진 도서관, ‘모음과 자음의 춤추는 홀’로 향해야만 했다.
숨겨진 도서관은 빛과 언어가 결합된 차원에 존재하는 장소였다. 이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현실과 완벽하게 분리된 다차원적 공간 속에서 무지개빛 모음과 자음들이 끊임없이 화려한 군무를 펼쳤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비로웠던 것은 ‘아에이오우’라 불리우는 최초의 모음들이 펼치는 환상적인 불협화음과 협화음의 묘한 조합이었다. 도서관의 벽과 천장은 문자가 살아있는 듯 수천 개의 알파벳 퍼즐 조각들로 빽빽히 구성되어 있었으며, 각 조각은 다른 언어들의 고유한 ‘혼’과 ‘맥락’을 품고 있었다. 이 알파벳들이 모여 순환하며 언어의 생명력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했다. 언어는 단지 기록물이 아닌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다는 이 보존소의 원리는 그 메커니즘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수호자들 중 ‘엘카’라 불리는 캐릭터는 이 도서관의 구조와 원리, 그리고 여기에 내포된 음향언어학과 정보형태론의 결합을 매일 연구하고 있었다. 그녀는 ‘음소생태학’이라는 독창적인 학문을 통해 알타라어를 비롯한 고대 언어들의 표현과 의미 구조가 현대 언어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그녀의 분석에 따르면, 알타라어가 사라진 것은 단순한 문자 소멸이 아니라 언어 자기유지 메커니즘의 붕괴라는 점에서, 이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언어 자체의 ‘음향 신경망’을 재구성하고 ‘뜻의 진동’을 회복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수호자들은 하나둘씩 도서관 내부의 가장 어두운 구역, ‘말의 방주’에 다가갔다. 그 방주는 보존소 내에서도 가장 위험한 곳이자 언어들이 잠들어 가는 심연에 해당했다. 이 깊은 장소에서 사라진 언어들은 희미한 빛조차 잃고 조용히 죽음에 가까운 무형의 상태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실라는 갑작스러운 언어의 파편을 발견했다. 그것은 알타라어 고어의 음운 조각이었고, 무수한 문자와 발음의 조합을 통해 깊은 역사의 단절된 순간을 증명하고 있었다.
촉수가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실라가 조각을 움켜쥐자 무지갯빛 자음들이 날개를 펼치며 폭풍처럼 방주를 가득 채웠다. 그 순간, 도서관 전체가 미묘한 떨림을 시작했고, 숨겨진 언어들의 생명의 끈이 새롭게 이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 순간, 검은 그림자 같은 ‘언어 망각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말의 숲의 암흑면이 형상화된 존재로, 사라진 언어의 기억과 정체성을 흡수하며 끊임없이 영역을 넓혀 왔다. 망각자들은 언어들이 잃어버린 감정과 고유성을 편집하며 사실을 왜곡했기에, 진짜 의미를 찾아내는 임무는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깨진 연대기를 바로 잡아야 하는 복잡한 ‘소리의 고고학’이었다.
톨란과 엘카는 서로의 음향적 파장과 심층 의미 체계를 연결하며 망각자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무지개빛 알파벳 조각들을 고리처럼 엮어 ‘언어의 보호층’을 형성했다. 그들의 연주처럼 얽힌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 진공 속에서도 도서관 구석구석에 파동으로 퍼져, 언어가 가진 원초적 힘을 재현하고 있었다. 이 순간 만약 실패한다면, 알타라어는 물론이고 수많은 잊힌 언어들이 완전한 소멸로 가는 문이 열릴 것이다.
갈등의 절정에서 실라는 용감하게 언어들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녀는 ‘침묵의 언어’라 불리는, 음성으로 표현되지 않는 몸짓과 느낌을 담아내는 언어 캐릭터들을 하나씩 불러 모았다. 그것은 기존 음절에서 파생되지 못한 ‘무형의 공명’, 곧 신체의 움직임과 정신의 감정이 만들어내는 은밀한 언어영역이었다. 조심스럽게 손길을 뻗자, 이 소리 없는 언어들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무드과 색채의 언어들로 바뀌어 빛나기 시작했다. 잠들었던 언어들의 숨결이 다시 도서관에 퍼져나가며 말의 숲의 심장에 어느 때보다 강한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그 생기는 동시에 새로운 파장을 낳았고, 도서관 내부 구획들의 차원 경계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언어가 단순히 생명이라기보다 그 자체가 다차원의 존재이기에, 그 힘은 곧 의식을 가진 문자가 서로 충돌하며 차원 간 균열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다. 수호자들은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끝없이 협력하며 언어들 간의 다리 역할을 했다. 그렇게 울려 퍼지는 희망과 불안, 그리고 새로운 도전의 소리는 차원이 겹쳐지는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냈다.
그 순간, 한 자줏빛 모음이 우뚝 솟으며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알타라어의 가장 핵심이자 잊힌 비밀, ‘회복의 소리’였고, 이 모든 이야기의 열쇠였다. 수호자들은 숨을 고르며 그 모음의 신비한 진동에 귀 기울였다. 이 진동이 완전히 회복된다면 그들은 사라진 언어 모두를 구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 결말은 끝나지 않았다. 언어 망각자들의 위협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숨겨진 도서관과 말의 숲은 그들에게 마지막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