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요한 새벽, 잠자는 언어 보존소의 오래된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곳은 세상의 빛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던 사라진 언어들을 품고, 그 존재들을 소중히 지키고 있었다. 언어란 단순한 소통의 도구만이 아니라 온전히 살아 숨 쉬는 생명체처럼, 세월과 문화의 기억을 안고 움직였다. 그 언어들은 한때 각기 다른 민족과 부족의 역사와 지혜를 품었고, 단 한 단어 속에 그들의 땅, 하늘, 바람, 그리고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언어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그것들이 깨어나기 위한 핵심 기억들이 희미해지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사라진 언어들을 구해내기 위한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 보존소의 주요 인물들은 개성 넘치는 직원들이었고, 그들은 말 그대로 한 글자, 한 음절에 깃든 민족의 영혼을 찾아 나서야 했다. ‘잠자는 언어 보존소’는 이름처럼 언어들이 잠들어 있는 신비로운 공간이며, 이들의 임무는 단순한 기록 보관이 아니라 살려내고 다시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 중 첫 번째 주자는 ‘씨야니’라는 이름의 언어였다. 씨야니는 겨울바람 같은 차가운 음성으로 알려진 언어였지만 사실은 눈꽃처럼 섬세하고 서정적인 기억들이 담겨 있었다. 닫힌 책장 속에서 잠자던 씨야니는 영영 잊히기 직전이었다. 보존소에서 가장 역동적인 ‘로엘’이 씨야니의 기억을 찾아 모험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언어들이 생명처럼 움직인다는 이 신비한 세계에서, 한 음절 한 음절에 내재된 의미를 해독하는 ‘언어학 마법사’였다.
로엘은 스스로를 ‘언어의 번역자’라 부르며, 말하지 못하는 언어들을 대신해 깨어나도록 돕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 그의 손끝에서 단어가 깨어날 때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스미고, 어둡던 세상에 따스한 빛이 내려앉았다. 씨야니의 첫 단어는 ‘마케’였다. 이 단어는 단순한 ‘눈’이라는 뜻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씨야니 민족이 겨울마다 함께 모여 이야기 나누던 ‘세대 간의 지혜와 기억의 다리’를 뜻했다. 로엘은 손으로 든 사전책을 펼치고 씨야니의 단어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입속에서 천천히 따라 말했다. 그러자, 뒤뜰의 오래된 나무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푸른 빛이 흐르며 미묘한 눈꽃 결정체가 돋아났다.
언어가 깨어나자, 씨야니가 서식하던 고원 마을의 기억도 함께 활짝 피어났다. 그들은 그 지역의 혹독한 겨울을 견디는 방법, 음성의 리듬 속에 생겨난 가락과 전설을 떠올렸다.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진 노래와 시, 그리고 비밀스러운 주문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로엘은 그것이 단지 말이 아니라 일종의 ‘기억의 끈’임을 알았다. 씨야니가 사라지면, 해당 민족의 문화와 정체성도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에게 더 무거운 책임감을 안겼다.
로엘은 다음 여정을 준비하며 보존소의 미로 같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가 곁눈질로 스쳐 지나간 곳에는 ‘티라탕’이라는, 오래전 신성한 의식에서 사용된 언어가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티라탕은 씨야니와 달리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고, 복원하기엔 훨씬 더 위험한 주문과 신비로운 힘을 품고 있었다. 여정을 함께할 동료, ‘에린’은 매끄러운 손놀림으로 고대 문자들을 복원하는 필사자다. 그녀는 티라탕의 불가해한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이들이 함께 떠나는 여정은 단순한 언어학 탐험을 넘어서, 시간과 기억, 문화 그 자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험이 될 터였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단어 하나에 깃든 민족의 기억’을 찾아,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언어들이 결코 잊히지 않도록 지키려는 사명을 이루어야 했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진정한 소통의 가치를 심어주는 일이기도 했으며,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를 품고 이해하는 길이었다.
모험의 문턱에서 로엘과 에린은 보존소의 오래된 지도 한 장을 펼쳤다. 거기에는 ‘단어의 뿌리’라 불리는 신비한 지역이 표시되어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곳은 최초의 언어들이 태어난 신성한 땅이며, 깨어난 언어들이 모두 그곳으로 향해야 완전히 부활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곳은 위험한 마법과 어둠이 도사리고 있기도 했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이 신비한 땅에서, 언어들이 온전히 다시 태어나기 위해선 ‘말의 기억’을 되살려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것은 단순한 단어의 흔적이나 고대 문서만은 아니었다. 언어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판타지적 세계관 속, 단어들 자체가 빛나고, 몸짓하며, 감정을 드러냈다. ‘마케’가 겨울바람을 타고 춤을 추고, ‘티라탕’이 고대 신들의 음성을 머금은 채 부드럽지만 강렬한 파장을 만들어냈다. 그 모습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고, 동시에 위험천만했다. 왜냐하면, 사라진 언어들이 깨어남과 동시에 이 세계 전체에 잃어버린 기억과 이야기가 폭발하듯 흩어지면서, 예기치 않은 변수가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언어가 단순한 소리와 글자가 아니라 살아있다니, 정말 믿기지가 않아.” 에린은 놀란 눈으로 말을 이었다. “이걸 지켜내는 게 우리의 사명이자, 동시에 세상에 소통의 가치를 심는 길이라는 뜻이지.”
로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중하게 말했다. “맞아. 단어 하나하나의 무게와 의미에 숨은 역사를 제대로 풀어내고, 우리가 사라져가는 언어들을 다시 살아 숨 쉬게 하는 건, 결국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는 첫걸음이기도 해. 이 모험은 어쩌면 이 세상의 모든 소통의 근원을 되찾는 여정일지도 몰라.”
그렇게 소설은 처음 한 문장, 한 단어의 무게를 알기 위해 출발했다. 마치 태초부터 쌓여온 언어의 폭포 앞에서, 잠자는 언어 보존소 직원들은 이제 막 첫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닥칠 모험—잊혀진 단어들과 그 안에 깃든 민족의 기억, 서로 어긋난 발음과 뜻이 끝내 어떤 비밀을 펼칠지는 그 누구도 미리 알 수 없었다. 한 글자, 한 음절을 찾는 모험은 그렇게 미지의 세계로 깊숙이 빠져들었다.
마지막으로 보존소 한 켠에 놓인 낡은 상자 속에서 반짝이는 한 단어가 깨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잊혀진 건 잊히지 않는다.’ 그 단어가 이 여정의 운명을 밝히는 첫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