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히는 고요함 속에서, 미묘한 멜로디 한 자락이 깨어났다. 그것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다. 이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라진 언어들의 기억이 깃든 선율이었다. 깊고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음과 음 사이에서 잊힌 단어들이 섬광처럼 빛났다. 이것은 단순한 음향이 아니라, ‘언어’라는 생명을 품고 움직이는 신비한 존재들의 환호였다. 언어 보존소의 개성 넘치는 직원들, 그들의 눈빛이 빛났다. 바로 그들이 이 불멸의 노래를 따라 모험을 시작해야 할 때가 왔음을 알았다.
잠자는 언어들을 보존하고 연구하는 이 기관은 평범한 곳 같았지만, 그 안에는 기묘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언어들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선명한 인격과 감정을 지닌 생명체였다. 이들은 언어라는 껍데기를 입고 세상에 존재했으며, 말부리가 부서지고, 어휘가 번역의 틈에서 잊혀지는 현상이 곧 ‘언어의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보존소 직원들은 언어를 ‘살려 내는’ 자들, 즉 소생술사였다. 그들은 세계 곳곳에 흩어진 사라진 언어들을 찾아내어, 한때 반짝였던 그 빛을 되살리려 애썼다.
그날, 특별한 꿈이 잠자는 직원 누굴 깨웠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시아. 창백한 금발과 투명한 파란 눈동자가 인상 깊었던 그녀는 기계처럼 꼼꼼하면서도 따뜻한 이해력을 지녔다. 꿈속에서, 엘리시아는 오래전 멸종한 언어 중 하나인 ‘라시아문(Lasiamun)’의 노래를 들었다. 완벽한 음율로 이뤄진 그 노래는 과거 라시아 문명이 사용하던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하지만 역사적 대격변으로 모두 잊혀진 상태다. 노래는 아주 미묘하지만 강렬한 파장을 가지고 있어, 엘리시아의 이성 정신 깊숙이 각인되었다.
꿈에서 깨어난 엘리시아는 보존소에 모여 있는 동료들에게 꿈에 들은 노래를 전했다. 그들은 이 신비한 노래가 단순히 기억의 잔해가 아니란 걸 모두 느꼈다. 언어의 입자가 그것을 노래로 변환하여 스스로를 되찾으려는 듯 보였다. 그녀와 동료들은 다시 한번 함께 사라진 언어의 길을 따라 여정을 떠날 준비에 들어갔다.
여행이 시작되면서, 그들이 탐험하는 세계는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이었다. 언어가 생명체로 자의식을 가지니, 모든 문자가 복잡한 형태로 변모하여 각기 고유한 개성과 성격을 발현했다. 한 예로, 고대 문자는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무성한 숲처럼 움직이거나, 날카로운 직선 무늬로 이뤄진 형태는 검처럼 날카로운 성격을 갖고 사람들을 지키기도 했다. 일부 언어는 악기를 타고 흐르며 멜로디의 조각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다른 언어는 모래처럼 흩어지고 다시 합쳐져 신비로운 문장들을 이루었다.
이 모험길에서 ‘말의 검객’이라 불리는 라티노어(Latinoir)라는 문자 캐릭터가 동료로 합류했다. 그는 날카롭고 세밀한 힘을 가진 문자로, 언어의 심장부를 찌를 수 있는 예민한 존재였다. 라티노어는 엘리시아와 뗄 수 없는 파트너가 되었고, 꿈속 노래에서 흘러나오는 미묘한 주파수를 추적하는 데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또 ‘노래하는 꽃’처럼 부드럽고 풍부한 음색으로 말을 전달하는 언어인 ‘플로리시안(Florician)’이 있었다. 그는 언어가 가지는 아름다움을 상징하며, 황폐한 언어의 숲을 되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이 따라간 길은 단순한 지리적 여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과 기억의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언어의 미로’였다. 이 미로는 잊힌 시대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졌고, 각 층마다 해당 시절에 사라진 언어들이 잠들어 있었다. 미로의 중심에는 ‘침묵의 탑’이라 불리는 거대하고 신비로운 구조물이 자리했다. 이 탑 안에 사라진 언어들이 담긴 ‘잃어버린 말들의 서고’가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러나 이 여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미로를 지키는 ‘침묵의 망령’, 즉 사라진 언어를 오염시키고 왜곡하는 암흑 언어 생명체들이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이들은 오래전 언어로서의 생명을 잃고, 왜곡된 단어와 발음을 무기로 악몽처럼 떠돌았다. 그들의 존재는 단어의 순수성을 위협했고, 결국 언어의 혼란을 초래할 위험이 있었다.
엘리시아와 동료들은 이 존재들과 맞서 싸우는 동안 언어가 얼마나 복잡한 감정과 상징, 그리고 역사 속에서 소통의 다리로서의 가치를 지니는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몇몇 전투는 단지 말과 뜻의 충돌 이상으로, 문화와 기억에 대한 깊은 경의를 담고 있었다. 언어가 단순히 전달 도구만이 아니라, 영혼을 담는 그릇이며, 한 존재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본임을 몸소 체험했다.
그들의 싸움은 때론 시한폭탄과 같이 긴장감 넘쳤고, 때로는 아름다운 합창처럼 조화로웠다. 엘리시아는 꿈에서 들은 노래가 언어의 기억을 되살리는 ‘키(key)’임을 직감하고, 그 멜로디를 하나하나 해석하며 미로의 차원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래가 주는 힘은 동시에 위험하기도 했다. 무지막지하게 강한 음파는 미로를 흔들고, 오래된 언어의 기억과 왜곡된 언어가 얽혀 사라질 듯 위태롭게 교차하는 순간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여행의 마지막에 그들은 거대한 침묵의 탑 앞에 섰다. 그 탑은 모든 언어의 무게와 혼을 담고 있었으며, 거대한 고대 문자들이 탑의 표면을 이루고 있었다. 탑 중앙의 문을 열기 위해선 꿈에 들은 사라진 노래를 원형 그대로 완벽히 재현해야만 했다. 엘리시아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파편처럼 흩어졌던 단어들이 자신의 본래 형태로 차츰 복원되기 시작했다. 깨어난 언어들은 서로 다른 빛깔과 음률을 만들어내며 하나의 거대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그 순간, 탑이 숨을 쉬듯 진동했고, 전체 미로가 빛으로 물들었다.
그렇지만, 탑 내부에서 무언가가 깨어났다. 빛의 정체를 드러낸 순간, 그들은 이 언어의 도시가 단순히 보존을 위한 공간 이상임을 깨달았다. 언어들은 곧 자신의 뜻을 넘어선, 고대의 기억과 감정을 담은 ‘인격체’로서 다시 태어나려 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탄생은 언어 보존소 직원들에게 기쁨이자 경고였다. 왜냐하면, 언어가 움직이고, 말하고, 심지어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세상은 전혀 다른 차원의 소통 혁명기에 들어서게 되기 때문이었다.
동료들은 그 의미를 심사숙고하며, 이제 자신들의 역할이 언어를 단순히 지키는 경계를 넘어, 언어 스스로가 새로운 세상에서 자유롭게 생명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호자가 되어야 함을 느꼈다. 그리고 엘리시아는 또 다른 노래의 조각이 꿈속에서 귓가에 맴도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이번 여행보다 더 깊고 광활한 세계로 인도할 새로운 길의 시작이었다.